누가 불안에서 희망을
건져 올릴 것인가

 
불안으로부터 희망을 건져 올릴 수 있는 마지막 보루는 어디 일까.
아무래도 종교라고 밖에 볼 수 없을 것 같다.

글. 나종우

세상 돌아가는 것이 조용하질 않다. 모두가 아우성이다. 경제가 어렵다. 취업이 어렵다. 살기가 어렵다. 어디에도 희망적인 소리가 들리질 않는다. 희망을 가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마디로 말한다면 어떤 일이든 예측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어제까지의 과거는 예측 가능한 시대였는데 내일부터 펼쳐지는 미래는 예측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공부 열심히 해라. 그래야 좋은 학교에 들어갈 수 있다. 좋은 학교 나와야 좋은 직장에 취직할 수 있다. 좋은 직장이 있어야 원하는 결혼을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예측 가능한 전제를 바탕에 두고 하는 말들이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무엇 하나 예측하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고 있다. AI 인공지능, 로봇이 사람이 해야 할 일을 맡아 하고, 일뿐만 아니라 생각까지도 사람보다 앞서나가고 있으니 아직 이런데 익숙하지 않고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다가올 미래를 예측할 수 없고 모든 일에서 불안하다는 것이다.
불안하다는 것은 안정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가 불안하면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이기적이 되고 내일을 생각하지 않게 된다. 과거에는 불안한 일이 닥쳐도 어떻게 되겠지. 좋은 세상 오겠지 하는 생각들이 있었다. 그러나 현대는 그 불안의 끝이 어딘가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게 불안한 것이다.

중국의 <고시원(古詩源)>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세상이 어수선 하여 사람들은 이익만을 좇아서 몰려간다. 또한 이익만 보면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모여 든다. 사람은 대개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는 동물인 것이다(天下攘攘, 皆爲利往, 天下熙熙, 皆爲利來).’ 이런 시가 나온 시대는 수백 년 전이다. 그렇다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세상이 불안하여 어수선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이끗만을 생각하고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차이는 현대는 예측 가능하지 않은 시대이기 때문에 불안이 공포 수준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대일수록 시대의 앞에서 희망을 안겨줄 사람이나 집단들이 역할을 해야 되는데 그런 사람이나 집단이 보이질 않는 다는 것이 문제이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 누구에게도 희망의 기대를 걸 수가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불안으로부터 희망을 건져 올릴 수 있는 마지막 보루는 어디 일까. 아무래도 종교라고 밖에 볼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오늘의 종교는 허울뿐인 종교도 많아서 종교가 사회의 지탄이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중세의 수도원처럼 불안하고 혼탁한 세상을 정화시키고 안정과 희망을 안겨줄 곳은 결국 종교가 아니겠는가. 혼탁한 호수에 쉼 없이 흘러 들어가는 가느다란 맑은 물줄기가 호수를 정화시키듯 지금이야 말로 참 종교인들과 참 종교지도자들이 그러한 역할을 자임(自任)해야 할 때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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