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業)’

글. 장진영 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HK교수·교무

우리는 하루 24시간을 살아가며,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몸과 마음을 작용한다. 이러한 심신작용은 모두 우리의 심층의식에 기억되고 저장된다. 그리고 다음 경계를 만나면 저장되었던 정보가 표층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모든 행위를 일반적으로 ‘업(業)’이라고 한다.

‘원래 마음’에 어떤 경계가 접촉하면, 그 경계에 대한 반응으로 마음작용이 일어난다. 이때 일어나는 마음작용은 이미 이전 어느 순간에 지어놓은 업의 결과, 즉 업보(業報)라 할 수 있다. 이 업보는 ‘업인과보(業因果報)’의 줄임말이다. 어떤 면에서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모든 심신작용은 이전 찰나에 지은 심신작용의 ‘업보’이며, 다음 찰나의 심신작용을 위한 ‘업인’이 된다. 이처럼 업인과보가 끊임없이 돌고 도는 것이 윤회이며, 인간을 비롯한 모든 유정(중생)이 고통 받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삶의 고리를 혹(惑), 업(業), 고(苦)라는 세 가지 모습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혹은 미혹함인데, 거짓된 자아를 실체라고 분별 망상을 일으키고 그것에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근본 무지(無明)의 미혹으로부터 정서적 결핍(渴愛)과 이기적 행위(惡行)가 자동적이고 습관적으로 이루어진다.

마음공부는 돌고 도는 고통스러운 삶의 고리인 ‘혹(惑)-업(業)-고(苦)’에서 벗어나도록 한다. 이러한 고리를 끊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통의 수레바퀴의 실상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알아차리지 않고 고통에서 벗어날 일은 요원하다.

이미 주어진 업은 부처님도 피할 수 없다고 하였다(定業難免).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업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고 한다. ‘정업난면’이라고 할 때, 이것은 우리의 모든 행위가 결국 지난 업의 소산이므로, 그 지은 결과에 대하여 피할 수 없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면만 생각한다면, 우리의 모든 행위에서 자율적 선택의 기회는 이미 상실된 것처럼 보인다. 물론 현상적 측면에서 지은 대로 받는다는 말은 부정할 수 없다. 이처럼 자업자득(自業自得)의 관점에서만 보면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는 것이 분명하고 자율적 의지작용에 의한 새로운 선택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의식의 차원에서도, 표층의식에서는 선악이 분명하지만, 심층의식에서는 선악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현상적 측면에서는 짓고 받는 행위의 주체 또한 매 순간 변하고 있는 무상한 존재일 뿐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현상적 측면에서 행위 주체는 이전까지의 모든 경험에 지속적인 영향을 받
지만, 본성적 측면에서는 외부의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율적인 선택의 기회가 만들어진다. 이러한 선택의 방향과 폭은 각자의 서원(원력)과 마음공부의 역량(심력)에 의해 결정된다. 다만 그것이 현실로 구현될 때는 개인적 업력(個業, 不共業), 즉 심리적·육체적 한계와 관계적 업력(共業), 즉 사회적·환경적 제약에 현실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이처럼 자율의지에 의한 선택이 가능할 때, 각자의 선택(행위)으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새로운 세상이 창조될 수 있으며, 그 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다.
그러므로 알아차림을 통해 고통의 실상을 낱낱이 분석함과 동시에 공적영지의 자성에 비추어 업의 뿌리인 무명의 실체가 따로 없음을 자각하는 공부를 병행해야 한다. 즉 본성적 차원에서 선악의 업보가 모든 끊어진 자리를 분명히 자각하고, 동시에 현상적 차원에서는 악업(惡業)은 다시 짓지 않고 선업(善業)을 짓는 공부를 함께 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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