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또는 함께하기

가족이 있어서 서로 부족하고 힘들 때 도와가며 살아가니,
참 든든하고 편하다.

글. 한은미

나는 나 혼자 하는 것들이 참 많다.
아이들도 나 혼자 키우고, 청소, 빨래, 밥도 나 혼자 한다. 반면 남편은 아들 유치원 등·하원만 시키고, 아이들 밥 몇 번 차려준 걸 가지고 자기 혼자 애들을 다 키웠다며 생색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게라도 도와준 게 감사할 일이지만, 이 세상 모든 엄마가 그렇듯 정말 난 지금까지 혼자 멀티플레이어로 살았다.
2년 전부터 워킹맘으로 살면서 이런 현실을 감당해 내는 것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퇴근해서 저녁 해 먹고, 설거지하고, 전쟁터와도 같은 집안을 치우는 쳇바퀴 같은 일들이 반복됐다. 나는 매일 숨 쉴 틈 없이, 아이들과 정답게 말 한번 나눌 여유 없이 꼬박 두 해를 보냈다. ‘왜 나 혼자만 이렇게 바쁘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 억울할 때도 많았다. 그래서 가족에게 짜증 섞인 말들을 하며 아이들 가슴에 생채기를 내곤 했다.
이제 큰아들이 6학년에 올라가는데, 나는 힘들 때마다 큰아들에게 모든 것을 떠넘긴다. 빨래 널고 개는 것부터 동생 씻기는 것까지…. 때로는 ‘가족 없이 나 혼자 살았으면 얼마나 홀가분하고 편했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또 아이러니하게도 큰아들에게는 “엄마는 원준이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말들로 고마움을 전한다.
올해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둘째는 아직 깨치지 못한 한글을 벼락치기로 공부하고 있다. 쉽게 익힐 줄 알았던 한글을 좀처럼 익히지 못하는 둘째는 엄마의 인내심을 테스트한다. 집안일을 끝내고 사무실에서 못다 한 밀린 업무를 처리해야 해서 마음은 급한데, 둘째 공부까지 봐줘야 하니 이만저만 짜증 나는 게 아니다. “원준아~ 엄마는 못 하겠다. 동생 공부 좀 봐줘라. 엄마는 원준이 없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몰라.”라고 말하며 또다시 큰아들에게 일을 떠넘긴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다행이다. 가족이 있어서 서로 부족하고 힘들 때 도와가며 살아가니, 가족이 있어서 참 든든하고 편하다.’
MBC <나 혼자 산다> 프로그램 속 연예인들은 혼자 살면서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마음껏 인생을 즐기며 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때로는 혼자라서 외로워 보이기도 한다. 나는 그들이 부러울까? 안쓰러울까? 지금은 나 혼자만의 시간을 꿈꾸지만, 막상 아이들이 다 커버려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마냥 즐겁기만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작년까지만 해도 모임이 있을 때마다 아이와 참석하느라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올해는 남편에게 아이들을 챙기라고 하고 나 혼자 모임에 나가는 횟수가 많아졌다. 아이들이 엄마를 따라간다고 보챌 나이도 지났고, 남편도 흔쾌히는 아니지만 못 나가게 하는 정도는 아니니, 이만하면 장족의 발전이 아닐까 싶다. 대한민국의 모든 초보 엄마들에게 “힘든 시간이 지나면 보상처럼 나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지니 잘 참고 견디며, 또 즐기며 인생을 살아가라.”고 이 선배 맘은 말하고 싶다.

감정의 공유

프로젝트가 잘 마무리되었어도 이 안도감과 성취감을
공유할 누군가가 없었다.

글. 안혜영

“여기 군산인데, 서울에서 어떻게 오시려고요?”
디자인 의뢰에 미팅날짜를 잡으려 하자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답변이었다. 그리고는 금세 메신저로 계약서와 원고가 날아왔다. 살펴보고는 20분 안에 계약이 이루어졌다.
군더더기 없는 말투에 대안까지 계산된 것 같은 이 담당자와의 프로젝트는, 첫 통화를 제외하곤 디자인 작업이 끝나는 날까지 관련 사항을 모두 메신저로만 전달받았다.
편집디자인이라는 작업은 의뢰자의 의도 방향과 맞아떨어져야 하기 때문에 보통 의견을 주고받는 미팅과, 식사를 하는 등의 부수적인 일들이 따르기 마련이다. 내성적인 성격의 나는 그동안 새로운 의뢰자와의 만남이 꽤나 버거웠기에, 이렇게 모든 감정을 배제하고 일하는 방식에 감탄했다.
그렇게 디자인 작업이 진행되면서, 나는 그 정확하고 군더더기 없는 담당자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사치레로 하는 안부를 묻는 가식은 빼 버리겠다는 이 담당자의 결의가 정확하게 똑떨어지는 문자 위로 오버랩 되었다. ‘나의 일하는 방식을 방해하지 마세요!’라고.
모니터를 부여잡고 혼자 사투를 해야 하는 나는, 사람 냄새 나는 양념 같은 감정이 사실은 버거웠던 것이 아닌가 싶다. 머릿속으로 색감, 문자, 레이아웃 등 전체적으로 잘 짜여진 이미지를 만들어내야 하는데, 사람 사이의 감정은 일을 더디게도 만들었다.
이렇게 각자의 위치에서 감정을 배제한 채 정확하게 일을 진행하는 방식에 감탄을 자아내다 보니 프로젝트는 잘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감정 없이 문자로만 전달되는, 마치 로봇 같은 일처리에 편안함을 느끼면서도 무언가 빠져있음을 느꼈다.  
힘든 일이 잘 마무리되면 ‘전우애’라는 감정이 생기기 마련이다. 협업하는 사람들이 미웠다가 좋았다가 고마웠다가를 반복하며 정이 들기 마련인데, 프로젝트가 잘 마무리되었어도 이 안도감과 성취감을 공유할 누군가가 없었다.
감정의 공유가 빠진 듯했다. 작업을 하다 보면 같은 경험을 하지 않으면 모를, 오롯이 설명되지 않는 감정이 있다. 이 감정의 공유가 서로의 마음속에 각인된다. 후에 나의 기억에 남는 것은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가 아니라 그 당시에 나눴을 감정들일 것 같다.
홀로가 좋았던 나에게 ‘좋은 사람들과 나누는 감정의 공유가 디자인에 양념이 되어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 시간이었다.

여수의 밤

파도를 거스르지도 따르지도 않았던 여수 밤바다의 풍경.

글. 홍세일

한 번은 혼자서 여행을 했었다. 처음으로 홀로 여행을 떠나게 된 건 지겨운 시간들을 잊어버리고 스스로를 찾아야겠다는 작은 용기였다.
기차여행상품인 내일로 패스를 전주역에서 구매하고, 지역 특산품인 초코파이를 받았다. 처음으로 도착하는 열차를 타고 떠나야겠다는 생각으로 기차를 기다렸고, 초코파이를 먹을까 말까 주물럭거리다가 결국 하행 열차를 탔다.
목적지가 정해지진 않았었다. 하지만 애당초 전주에서 하행기차로 갈 수 있는 종착역이라곤 여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나는 뭔가 정해진 곳으로 가는 듯한 묘한 느낌을 받았다.
저녁쯤 기차를 타서 여수역에 도착했지만 실은 가야할 곳도 가고 싶은 곳도 없었다. 아무런 연고 없이 길을 걸었다. 걷다 보니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그 당시 자주 들었던 ‘여수 밤바다’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그 밤바다를 거닐던 누군가의 독백이 상상됐다. 자연스럽게 가장 가까이 보이는 물가를 찾아 걸었다. 그러다 어떤 둔치에 앉았다. 달리 들어 있는 건 없었지만 무게가 꽤 되는 가방을 내려두고 앉아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여수 엑스포의 기물들이 흔들리는 파도에 달과 함께 부딪히는 광경을 아무 생각 없이 앉아 보고 있을 때였다. 그때 숭어들이 물 밖으로 뛰어올랐다. 숭어 철이었다. 뛰어오르며 존재감을 과시하는 숭어들을 바라본 후 달을 한 번 봤다. 한 시간 쯤 앉아 숭어와 달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자리를 벗어났다.
출출하기도 하고 눅눅한 초코파이에는 손이 가지 않았기에 무작정 빛이 많은 곳을 향해 걸었다. 사람들이 사는 층 낮은 집들 사이를 기웃거렸다. 기숙사와 대학건물들, 원룸촌을 가로지르던 대학생활과는 이질적인 풍경들이었다. 동시에 사람이 살아가는 익숙한 향기가 느껴졌다. 한참을 걷다 보니 30년도 더 돼 보이는 어느 낯선 국밥집 앞에 다다라 있었다. 시간이 꽤 늦었으나 할머니 한 분이 아직 장사를 하고 계셨다. 자리에 앉아 국밥과 머리고기 수육 그리고 잎새주 한 병을 시켜 술잔을 기울였다.
옆자리에는 이 가게를 자주 찾으신다는 어르신 두 분이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고 계셨다. 어리숙한 나였지만 옆에 앉아계시던 분들께 말을 걸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술을 한잔 주고받으면서 당신의 지난 20년을 더듬으셨다. 그분의 세월이 느껴졌다.
인생의 목적지에 대한 뚜렷한 생각들을 가지고 살았던 내게 여러 가지 삶의 향취에 대한 갈망이 생기기 시작했던 건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스스로를 찾기 시작한 것인지, 스스로가 어디 있는지를 알고 있었던 것인지, 그런 것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던 여행의 시작. 그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나든, 숭어처럼 펄떡이는 어린 나이에 파도를 거스르지도 따르지도 않았던 여수 밤바다의 풍경을 떠올리며 그때의 노래를 가끔 흥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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