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산 박광전 종사의
동경 유학과 동양대학

글. 박윤철

지난 11월 23일 오후 2시부터 5시 30분까지 일본 동양대학(東洋大學) 아시아문화연구소가 주관한 공개심포지엄에 참가하여 <현대에 살릴 한국사상>이라는 주제로 특별강연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잘 알려져 있듯이, 동양대학은 숭산 박광전(1915~1986) 원광대 초대총장께서 엄혹했던 일제 강점기에 5년간이나 유학했던 대학이다.

원광대학교의 건학이념은 ‘지덕겸수 도의실천(知德兼修 道義實踐)’이다. 이는 숭산 초대총장이 35년간 심혈을 다해 구현하고자 했던 원광대학교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원광대 역사에서 숭산 초대총장의 공적은 절대적이다. 이에 지난 1년간 숭산 초대총장의 기념전시실 리모델링 작업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리모델링 작업 마무리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 동양대 초청을 받아 도일(渡日)하게 되었다. 원광대 모든 구성원들에게 숭산 초대총장의 생애와 활동을 널리 알리라는 진리로부터의 지상명령처럼 생각되었다.

도일 한 달 전, 동양대 측에 연락하여 숭산 초대총장 관련자료 열람을 요청했다. 심포지엄 하루 전인 11월 22일에 동양대학 문학부 교무과의 협조로 숭산 초대초장의 학점 이수 상황이 기록되어 있는 <동양대학 문학부 철학과 성적표> 등을 포함한 몇 가지 자료를 열람했다.

자료를 접하는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왜냐하면, 숭산 초대총장이 동양대학에 유학하던 시기는 제국주의 일본에 의한 대륙침략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숭산 초대총장의 조국 식민지 조선은 일제의 병참기지로 전락한, 그야말로 어둡고 어둔 시기의 유학이었기 때문이다. 성적표 등에는 어두운 시대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는 듯, 박길진(朴吉眞)이라는 본명 위에 선이 그어진 채 일원광전(一圓光田)이라고 창씨개명(創氏改名)된 기록이 눈에 들어왔다.(사진1 참조) 한 마디로, 숭산 초대총장의 일본 유학은 우리나라가 가장 암흑기에 처해 있던 시절에 그 암흑기를 뛰어넘기 위한 지혜와 실력을 양성하기 위한 방안으로 선택된 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생전에 숭산 초대총장이 회고한 유학 동기를 읽어본다.

내가 일본유학을 하게 될 때 총부에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결국 한 사람이라도 끝까지 가르쳐야 된다는데 집약되었다. 이때 나는 나의 진로에 대해서 그리고 유학하는 목적을 분명히 대종사님께 말씀드렸다. (중략) “제가 공부하려는 것은 불법연구회 교법을 주체하고 이 법을 더욱 폭넓게 펼쳐 나가기 위해서 철학과 제(諸) 종교를 연구하려고 합니다.” (‘나의 삶, 나의 꿈’, <숭산종사 추모기념대회, 아 숭산종사>, 2004년 12월 3일, 44~45쪽)

숭산 초대총장의 일본 유학은 원불교 1백년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했기에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고 있던 시대 상황은 물론, 1930년대 중반 교단의 경제상황 역시 숭산 초대총장의 일본유학을 제대로 감당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당시 불법연구회 내부에서 여러 논란이 있었고,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허락된 유학이었기에 숭산 초대총장의 각오도 남달랐을 것이다. 우리 후학(後學)들이 반드시 숭산 초대총장이 걸었던 길, 그리고 그 길 위에 새겨져 있는 값진 교훈을 내재화하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다시 ‘동양대학 문학부 철학과 성적표’ 속으로 들어가 보자. 숭산 초대총장은 동양대학에 5년
간 유학했다. 2년 과정의 예과(豫科)를 거쳐 3년 과정의 철학과 본과(本科)를 이수한 것이다. 여기서 필자가 열람한 성적표는 본과 3년간에 걸친 학점이수 성적표이다. 성적표에는 이수과목별로 점수가 흑색으로 표기되어 있고, 이수결과가 붉은 색 글씨로 적혀 있다. 그리고 성적표 하단에는 전문학과(철학전공) 평균점을 비롯하여 졸업논문 성적과 석차 등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필자가 숭산 초대총장의 동양대학 성적표를 주목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숭산 초대총장이 동양대학 철학과에서 이수한 전문학과(철학) 및 일반학과(교육학, 심리학, 윤리학, 외국어 등) 등이 바로 원불교학(圓佛敎學)을 한국학계가 인정하는 보편학문으로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초석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숭산 초대총장은 원불교학의 태두(泰斗), 특히 ‘일원철학’(一圓哲學)을 확립한 원불교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일원철학’이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었다. 그런데 소개한 성적표에 명기된 다양한 과목명을 통해 이제 우리는 ‘일원철학’ 형성의 연원과 그 유래의 일단을 해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숭산 초대총장이 이수한 교과목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여기서는 동양대학이 어떤 대학인지 그 성립의 역사와 학풍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한다. 동양대학은 이노우에 엔료(井上圓了, 1858~1919)가 그의 나이 29세 때인 1887년에 “모든 학문의 기초는 철학에 있다.”는 신념 아래에 철학의 보급을 위해 설립한 철학관(哲學館)이 그 전신으로써, 1906년에 사립 동양대학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설립자 이노우에 엔료의 건학이념이 숭산 초대총장의 동양대학  유학 동기에 일정하게 영향을 주었음을 아래와 같은 숭산 초대총장의 회고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37년 3월 20일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4월 일본 유학의 장도에 오르게 되었다. 지금처럼 항공편이 없었으므로 배편을 이용, 머나먼 일본 땅에 당도하였다. 말만 들었던 일본. 동경에 있는 동양대학 예과에 입학하였다. 전 학과생을 통틀어 한국인은 나 하나뿐이었다. 내가 동양대학을 선택한 것은 철학을 전공하기 위해서였다. (‘나의 삶 나의 꿈’, 위의 책, 43쪽)

동양대학은 현재 동경도 안에 있는 백산(白山)캠퍼스를 비롯하여 5개의 캠퍼스를 가지고 있다. 13개 학부 46개 학과에 학부 재학생만 2만 8천여 명, 2019년 입시에서 동양대학 철학과에는 1,716명이 지원하여 338명이 합격하였다. 철학과 경쟁률이 무려 6:1에 이르고 있으니 부럽기 그지없다. 철학과 경쟁률이 이렇게 높은 것은 아마도 설립자 이노우에의 신념이기도 했던 “모든 학문의 기초는 철학에 있다.”는 동양대학의 건학이념이 지난 130여 년 동안 일본 사회에 널리 알려진 덕분이 아닌가 한다. 때마침 작년(2019년)은 동양대학 설립자 이노우에 엔료 서거 백주년이 되는 해여서 다양한 기념사업이 펼쳐지고 있었고, <산케이신문(産經新聞)> 2019년 6월 6일자 4면에는 이노우에 서거 백주년 기념 특집기사가 게재되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명문대학은 모두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명문대학이란 다름 아니라 본래 그 대학을 세운 목적, 즉 건학이념 구현에 한결 같이 매진해 온 대학이라는 점이다. ‘세계유일’을 지향하여 출발한 우리 원광대도 숭산 초대총장의 업적 재조명을 통해 명문대학으로 도약을 꿈꾸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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