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선의 방법⑥

글. 이정근

6. 정신은 항상 적적(寂寂)한 가운데 성성(惺惺)함을 가지고 성성한 가운데 적적함을 가질지니, 만일 혼침에 기울어지거든 새로운 정신을 차리고 망상에 흐르거든 정념으로 돌이켜서 무위 자연의 본래 면목 자리에 그쳐 있으라.

우리가 선 수행의 경지를 이야기할 때, 뭔가 특별한 경지 또는 어렵게 말해야 선을 잘하는 것이라고 여기곤 한다. 그래서인지 선 수행의 경지를 표현한 것들은 모두 이해하기 어렵거나 애매한 표현이 많다.
우인훈련원에서 선 훈련을 할 때 어느 교당 교도님이 말했다. “교당에서 선방을 운영하고 있는데 선을 마치고 나면 방장님이 항상 ‘오늘은 무엇을 보셨습니까?’라는 질문을 해요. 저는 그에 대한 대답이 늘 궁했는데, 이번에 선 훈련을 하면서 대답을 얻은 것 같습니다.” 무엇을 보셨느냐고 여쭈어보니 “다리 아픈 것을 보았습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처럼 선이란 어렵고 애매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제 생활 속에서 살아 움직여 우리의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적적성성, 즉 고요함과 깨어있음 이 두 단어는 수레의 두 바퀴처럼 선 수행을 할 때 중요한 요소다. 고요함과 깨어있음이 함께 균형을 잘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적적이란, 고요하고 고요해서 어떤 번뇌도 일어나지 않는 평화로운 상태를 말한다. 물결이 잠잠해진 호수처럼 평화롭고, 시끄럽거나 소란스럽지 않다. 그러나 호수가 고요하기만 하고 전혀 움직이지 않으면 이내 흐름이 단절돼 물이 썩고 생명도 죽어간다. 마음 역시 고요하기만 하면 차츰 흐릿해지다가 혼침이나 무기에 빠지게 된다.

성성이란, 청명한 가을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의 모습처럼 영롱하고 또렷하게 마음에 와 박히는 것이다. 또렷또렷하게 깨어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성성함에만 빠지게 되면 번뇌 망상이 치성하기 시작한다.
사실 선을 하다 보면 지금의 내 상태를 정확히 알기가 어렵다. 그래서 나의 경우, 우인훈련원에 있을 때 나름의 표준을 세웠다.
먼저 ‘적적하다’는 것을 ‘선을 하면서 떠오르는 망상과 잡념에 꼬리를 물지 않은 상태’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망상과 잡념이 떠오르면 ‘망상이구나.’ ‘잡념이구나.’ 하고 알아차리기에 힘썼다. 망념과 잡념이 사라지지 않고 끈질기게 이어질 땐 얼른 호흡을 챙겨 단전주에 힘쓰는 것으로 적적함을 유지했다.

‘성성함’은 주변의 일체 상황(특히 늦가을에서 봄까지 목재 집에서 나는 소리와, 봄부터 가을까지 나무 데크 위로 감이 떨어지는 소리)에 대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음으로 규정했다. 주변의 상황에 대하여 조금도 흔들리지 않음은 성성함을 잘 유지하는 것, 조금 흔들리면 사심잡념을 끓이는 것, 깜짝 놀라는 것은 사심잡념과 무기에 떨어진 것으로 표준을 세웠다.

내가 체험한 ‘적적성성’이 있다. 선을 하는 가운데 주변의 모든 상황들이 동시에 사진을 찍은 것처럼 너무도 선명하게 드러나는데도 불구하고, 정신은 주변의 모든 상황들이 청명한 가을하늘에 쏟아지는 별처럼 초롱초롱하게 마음에 박혀 빛나는 평화로움이었다. 매번 이러한 체험을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지금도 선을 할 때면 늘 적적한 가운데 성성함을 유지하고 성성한 가운데 적적함을 유지하기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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