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옥이들에게

감사하게 우리 남편과 친구들은 내 이름을
너무나도 다정하게 불러주곤 한다.

글. 이영옥

내 이름은 이영옥이다.
이름에 ‘옥’이 들어가는 이유로 학창 시절 나의 별명은 주로 옥이, 옥수수, 옥동자, 옥구슬, 여옥이(여명의 눈동자에 나오는 여주인공 이름) 중에서 붙여지곤 했다. 내 이름이 촌스럽기도 하고 특히 ‘옥’이 들어가는 것이 너무나 싫어서 결혼을 하기 전까지도 나는 부모님께 개명을 하겠다고 억지와 떼를 부렸다.
결혼을 앞두고 지금의 남편과 함께 유명하다는 철학관을 소개받아 방문 한 적이 있었다. 평소 나는 그런 것(사주, 궁합 등)을 믿지도 않고 관심도 없던 터라 ‘어디 얼마나 잘 하나 볼까.’라는 마음으로 방문을 했는데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신랑과 나의 이름을 풀이해 재물운을 알려주었는데, 글쎄 내 이름 ‘이영옥’에 재물이 많다는 것이다.
그 말에 흔들릴 내가 아니기에 결혼을 하고 나서도 나는 남편에게 개명을 하겠다고, 한다고 여러 번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남편은 재물이 많이 따르는 이름이라며 절대로 안 된다고 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결혼한 지 16년이 되어 지나온 삶을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것 같아 만족한다. 하지만 아직도 내 카톡 이름이 ‘이연희’가 아닌 ‘이영옥’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씁쓸했다.
언젠가 책을 읽다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 주변을 먼저 사랑하고 나와 관련된 것들부터 사랑하라.’는 글귀가 기억에 남아 열 번도 넘게 필사를 하며 읽었던 적이 있었다. 그 글귀를 마음에 품고 살면서 나는 나를 사랑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조금씩 노력을 했었다. 하지만 정작 내 이름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무관심하게 살아왔던 것 같아 씁쓸할 뿐이다.
그런데도 감사하게 우리 남편과 친구들은 내 이름을 너무나도 다정하게 불러주곤 한다. 부모님께서 나를 품고 기다리며 좋은 뜻과 마음을 담아 고심 끝에 지었을 내 이름. 그 동안 사랑해주지 못했던 내 이름 앞에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끝으로 이 글을 쓰면서 진정으로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을 선물 받은 것 같아 감사하다. 또 촌스럽다고 생각하며 개명할 기회만 찾았던 나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해주어 나를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정말 감사하다.
“이 세상의 모든 옥이들을 사랑합니다.”

이름에 대한 변명

신부님은 성호도 긋지 않고 어정쩡한 내 모습이 아무래도 수상했는지,
내게 세례명이 뭐냐고 물었다.

글. 강은호

일을 하다 보면 이름이 사라진다.
팀장님, 간사님, 부장님, 교무님…. 삭막하다. “민수 샘~.” “은호 님~.” 이렇게 이름을 부르면 더 친근하고 좋은데….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직책을 불러주는 게 그 사람을 제대로 대우해주는 것이라 한다. 그 사회생활에 아직 적응을 못 하겠다. 아니, 적응을 하기가 싫다. 나 역시 다른 사람을 직책으로 부르고 있는 모습이 슬프다. 간사, 팀장, 이런 말들은 나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오히려 나를 가릴 뿐이다, 안전하게.
나는 심지어 이름이 여러 개다. 강민수, 강은호, 담마삐야, 혜관, 덕우, 패트릭… 숨겨진 이름 ‘바오로’도 있다. 이 이름들에 대해 해명하고자 한다.
나는 내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교과서에 자주 나오던 ‘민수’라는 이름. 뭔가 착해빠진, 아니면 흔해빠진. 나에게 묻지 않고, 지어진 이름이라 싫었다. 요즘의 페미니즘 식으로 하자면, 강민수가 아니라 박강민수라 해야겠지만, 나는 그냥 둘 다 빼는 편이 나았다. 우리 부모님도 모르지만, 나는 혼자서 성을 바꿨다. 강(姜)에서 강(腔)으로. 空에 月, 그것이 나의 뿌리다.
‘은호’는 원불교에서 받은 이름이다. ‘담마삐야’는 테라와다불교에서 받은 이름이고, ‘혜관’과 ‘덕우’는 조계종에서 받은 이름이다. ‘패트릭’은 성공회 교회를 다니며 내가 선택한 세례명이고, ‘바오로’는 내가 거짓말로 얻은 이름이다.
나는 가톨릭대학교에서 불교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성공회 교회를 다녔다. 가톨릭대학교에서는 특별히 채플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개강 미사 한 번만큼은 필수로 참석해야 했다. 나는 모태신앙으로 개신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은 몸이라, 성공회에서는 처음부터 자유롭게 영성체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톨릭 미사는 매우 엄격해서 가톨릭 신자가 아니면 영성체를 하지 못하게 했다.
그때는 아직 성공회도 다니기 전이라, 영성체 때 주는 그 쌀과자(?) 맛이 궁금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영성체 줄에 서고 말았다. 먹지 말라면 더 먹고 싶은 선악과를 따먹는 심정으로. 신부님은 성호도 긋지 않고 어정쩡한 내 모습이 아무래도 수상했는지, 내게 세례명이 뭐냐고 물었다. 순간적으로 생각난 이름이 ‘바오로’다. 그때부터 나는 바오로라는 이름의 가짜 천주교 신자가 됐다.
이쯤 되면 네 진짜 이름은 뭐냐는 추궁이 나올까 두렵다. 너는 도대체 어디에 속하냐는 것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름은 ‘담마삐야’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나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싶다. 하지만 진리도 사랑도 버릴 수 없었다. 혜관(慧觀)이기만 하고 덕우(德雨)하지 않을 방법이 있겠는가. 진리를 사랑한다면, 은혜가 넓지(恩浩, 은호) 않을 방도가 있겠는가.
좀 뜬금없긴 하지만, 1990년대 옛 노래가사로 변명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왜 내가 아는 저 많은 사람은 사랑의 과걸 잊는 걸까. 좋았었던 일도 많았을 텐데, 감추려 하는 이유는 뭘까. 내가 사랑을 했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 언제까지나~.”
나는 내 모든 이름이 부끄럽지 않다. 바오로를 포함해서.

너는 Bob이 아니야

미국 이름을 쓰며 미국에서 지내자 완전히 미국인이 되어버렸고,
결국 민족성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글. 유경세

내 이름은 유경세(兪經世)이다. 글 경(經)자와 세상 세(世)자를 써서 ‘세상의 책’이라는 의미로 부모님이 지어주셨다. 경(經)자는 다스릴 경자로도 쓰여서 경제(經濟)할 때의 경이기도 한데, 그래서 어렸을 때는 ‘세상을 다스린다.’는 의미로 해석하여서 너무 큰 이름을 지어주신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다 원래 이름의 의미를 알고는 내가 알던 뜻보다 더 큰 뜻이었구나 하고 혼자서 생각해본 적도 있다.
형의 이름은 유경덕(兪德)인데 크게 공경하라는 뜻의 법명이다. 우리집의 경우 가족이 모태신앙으로 전부 원불교인데, 놀랍게도 형의 태몽이 소태산 대종사님이 어머니에게 아이를 주는 꿈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부모님은 교무님에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드렸고 형은 법명이자 속명으로 둘 다 유경덕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그렇게 형의 이름을 원불교에서 소중히 받은 후 어머니께서 나를 임신하셨을 때, 나의 이름을 지으려고 상당히 고심을 하셨다고 한다. 그때 마침 어머니의 법명이 김성경(金聖經)이어서, 형과 ‘경’자 돌림을 맞추고 어머니의 경(經)자를 따서 ‘경’의 어감과, 의미를 가진 ‘세’자를 합쳐 나의 이름인 경세(經世)가 지어진 것이다.
이름에 대한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다. 내 이름을 영문으로 표기하면 Kyoung Se Yoo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경’이라는 발음은 k+young(영, 젊다)이라 외국인들이 발음하기 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나만의 생각이었다. 나는 해외에 산적도 있고 여러 외국(말레이시아, 캐나다, 미국)을 돌아다녔는데, 그동안 나의 이름을 정확히 발음하는 외국인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심지어 읽는 것조차 어려워하고, 혹 읽더라도 ‘키용’이라고 발음했다. 그래서 나는 외국 사람들이 나를 편하게 불러줬으면 하는 생각으로 Bob이라는 외국이름을 썼다. 미국에서는 한국의 ‘철수’ 정도 되는 이름이다.
그러다보니 외국인들은 나를 주로 Bob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올해 기회가 돼서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한 달 정도 인턴을 했던 회사의 사장님은 달랐다.
나의 한국 이름과 외국 이름을 알려주자, 사장님은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 아프리카 아이가 있었는데, 그 소년은 아프리카 이름이 있었고 아프리카에 살다가 미국으로 와서 미국 이름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렇게 미국 이름을 쓰며 미국에서 지내자 완전히 미국인이 되어버렸고, 결국 민족성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너는 Bob이 아니야. 그 이름을 사용 하지마. 너의 한국 이름을 여기에 적어줘.”
나는 사장님에게 이름을 적어드렸고 사장님은 포스트잇에 내 이름을 옮겨 적더니 자신의 컴퓨터 모니터 밑에 붙여두고는, 나를 부를 때 마다 항상 그 포스트잇을 보며 내 이름을 불렀다.
물론 사장님은 내가 인턴을 하는 한 달의 기간 동안 내 이름을 정확히 부른적이 없다. 하지만 미국인인 사장님이 나를 영어로 편하게 부를 수 있는 것을 택하지 않고 나의 한국 이름을 불러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고맙고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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