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감사하다

글. 송영준

수능 성적표(만점)가 나오고 지난 몇 주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나날들이었다.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도 많이 받고, 또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끊임없이 축하 받으며 행복한 순간을 보냈다. 인터뷰도 많이 했는데, 그 중에 어떤 기자 분께서 하셨던 질문이 하나 생각난다. “지금 누구에게 가장 감사하세요?”
내 대답은 어머니, 혹은 담임선생님이었다.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때 내 대답은 어딘가 부족했던 것 같다. 과연 나는 특정한 사람에게 ‘가장’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럼 중학교 1학년 때 나를 철들게 해주셨던 담임선생님께는 덜 감사한 걸까? 고등학교 입학 후 나를 응원해주셨던 담임선생님께는 덜 감사한 걸까? 그 외에도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내 질문에 답해주시고 나를 성장하게 해주셨던 수많은 선생님들과 나를 도와주셨던 다른 어른들, 친구들에게는 덜 감사하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사실 답은 정해져 있다. 나는 나를 위해 헌신해주신 어머니에게도, 열정을 가지고 나를 이끌어주셨던 담임선생님께도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고마움을 느낀다. 그렇지만 그러한 고마움이 있다고 해서 두 분 이외의 사람들이 보내준 나를 위한 사랑과 애정을 깎아 내릴 마음은 추호도 없다.
사회의 탓일지, 개개인의 탓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입에 담을 수 있는 모든 단어에 등급을 매기려는 악습을 가지게 된 것 같다. ‘그냥’ 사랑하는 사람을 넘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찾기 시작하고, ‘그냥’ 맛있는 음식이 아닌 ‘가장’ 맛있는 음식을 가리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현대 사회가 낳은 슬픈 습관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등급을 매기는 비극은 나의, 그리고 다른 학생들의 성적에 매겨지는 것으로 끝을 내렸으면 한다. 그리고 또 생각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헌신이 지금의 나를 만들기 위해 쏟아졌을지. 내가 만난 사람 중 내가 감사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다. 결국 내가 만난 모든 사람과의 연(緣)이 지금의 나를 빚어낸 셈이다. 그러한 나를 만들어 준 모든 사람에게 감사하다. 내가 그러하듯, 우리 사회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내 안의 소리를 듣다

글. 김정인

“일도 잘하고 싹싹하네.” 어른들이 많은 가족 행사에서나 아르바이트를 할 때 많이 들었던 말이다. 나는 이 칭찬이 참 듣기 좋았고, 나에게 오는 이 칭찬을 계속 듣고 싶어서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싹싹한 사람이 되었다. 아니, 비난을 받기 싫었던 것 같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었고 그 방법이 일을 잘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대체로 주위 사람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편이었고 그것이 불편하다고 인지해보지 못했다. 특히 어른들에게 예의 없는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자주 했지만 크게 불편하지 않았고, 그것이 내 인생에 크게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나의 불편함은 원불교대학생연합회(이하 원대연) 중앙임원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중앙임원으로 참가한 첫 대학선방에서의 나는 예민함, 그 자체였다. 내가 예민한 것을 3일 차에 접어들 무렵 다른 교우와의 대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깨달았다. 정말 큰 충격이었다. ‘내 예민함이 남들에게 느껴질 정도였다니….’ 대학선방에 온 입선인들에게 참 미안하고, 예민해지는 내 마음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왜 그렇게 예민했을까? 선방이 끝날 때까지 나의 화두였다. 대학선방은 살면서 내가 기획해본 가장 큰 행사였고 그만큼 일도, 그 영향력도 컸다. 이러한 행사에서 그 많은 사람들에게 ‘일을 잘한다.’라는 인상을 심어 잘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완벽하고 싶은 마음이 예민함을 불렀다. 바뀌고 싶었다. 잘하려 애쓰고 칭찬받으려 몸부림치는 것이 힘들게 느껴졌고 남들이 하는 칭찬보다 내 안에서 울리는 소리로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들고 싶었다.
먼저 일 중심적으로 살아왔던 나를 바꿔보려 했다. 일머리가 좋아 일을 잘하고 칭찬도 많이 받았지만, 사람과의 관계보다 일을 중시했기 때문에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준 경우가 많았다. 원대연 활동을 하면서 일이 조금 더디더라도 함께하는 것을 연습했다. 때로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보다 함께하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느낀다.
“대학선방 망해도 돼!” 원대연 지도교무님인 안성오 교무님이 선방 준비를 하며 자주 하신 말씀이다.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대학선방의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 중에서 우리들의 공부가 중요하다는 말씀이셨으리라 짐작해본다. 이렇듯 우리 임원들은 일과 공부를 함께하려 노력했다.
칭찬을 받고 싶어 내 안의 소리를 듣지 못한 채 살아왔던 나는 원대연을 만나 조금씩 내 안의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내 마음의 힘을 기르고 조금씩 자유로워지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더 자유로워질 앞으로의 내가 기대가 된다.

선물 같은 하루

글. 김원여

매주 수요일은 4~5명의 교도님과 함께 서귀포에 주둔한 해군부대 법회를 보기 위해 출발한다. ‘무슨 간식 가지고 가야 할까? 과연 오늘은 몇 명이나 나올까? 오늘 준비한 간식을 우리 수병들이 좋아할까?’ 설레는 마음을 안고 1시간 정도를 달려간다. 
수병들이 도착하기 전에 불단을 세팅하고 교전과 독경집을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는다. ‘오늘은 몇 명이나 올까.’ 문밖에 서서 기다리다가 아이들(수병들)을 맞이하면 반갑기 그지없다 “일주일을 어떻게 보냈니?” “오늘 점심 메뉴는 뭐였어?” “계급장이 바뀌었네. 승진했구나, 축하해! 제대는 얼마나 남은 거니?” 이렇게 서로 눈을 맞추고 한참 동안 정담을 나눈 후에야 법회가 시작된다.
설교를 귀담아듣다가 교무님이 설교를 마치며 던진 질문에 거뜬히 대답하는 아이들도 있고, 너무나 피곤한 나머지 고개를 떨구고 귀엽게 꾸벅이는 아이들도 있다. 모두가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사랑스러운 존재이다.
제주교구에서 해군교화를 시작한 지 벌써 3년이 지났다. 입대한 아이들 중에는 군 복무가 의무라는 생각에 분명 힘들어하는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원불교 법회가 정서에 도움이 되고 심신의 안정을 얻을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실 그들에게는 무엇을 많이 전해주는 것보다 고향 어머니 같은 따뜻함이 더 필요할 때다. 법회가 끝난 후 이어지는 간식 시간에 같이 앉아서 간식을 나눠 먹으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마치 엄마와 아들 같은 그 모습이 따듯하다.
12월 18일은 연말 송년법회가 열릴 예정이다. 우리는 법회에 잘 나온 아이들 다섯 명을 뽑아서 그 아이들의 부모님에게 ‘귤 보내주기’를 계획했다. 가장 제주도답고 귀여운 발상이다. 이미 교도님 한 분은 입교한 두 명의 수병들 부모님에게 귤을 선물하셨다고 한다.
요즘, 법회에 제법 익숙해진 아이들은 입교원서를 쓰고 원불교 마음공부를 함께 해보겠다고 한다. 이러한 수병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전역을 앞둔 아이들을 앞으로 못 봐서 어떡하나 아쉬워하면서, 그들과 전화번호를 주고받았다. 전주 부산…. 아이들의 고향에 여행 겸 놀러 다니며 아이들을 다시 만나고 싶다. 아이들을 그 지역 교당과도 연결해 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앞으로 한 교당 한 교당의 주인이며 미래 우리 교단의 주역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면, 더 큰 사명감으로 다가온다. 아이들과 만날 수 있는 매주 수요일은 그 무엇보다 소중하며 나에게 특별히 주어진 선물 같은 하루이다. 새해에는 법당이 마련되어 우리들만의 공간에서 더 활발한 만남이 이뤄지고 아이들에게 간식도 조리해줄 수 있기를 꿈꾼다.

역경 속에서 피어난 은혜

글. 주경심

결혼 후 빨리 아이를 갖고 싶어 하던 큰딸에게 쉽게 아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좋은 법연이 오기를 모든 가족이 정성껏 기도를 했고, 드디어 아이가 생겼습니다. 벌써 3년이 지난 이야기입니다.
우리 가족에게 소중한 인연으로 온 외손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뻤습니다. 손자는 법신불 사은님의 큰 은혜 속에서 많은 인연들에 사랑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뒤집기도 못 하던 갓난아이였던 외손자가 딸의 부주의로 크게 다쳐 중환자실에 가게 되었습니다. 아직 엄마 품이 필요한 젖먹이가 혼자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다투고 있을 때 가족들은 고통 속에서 법신불 사은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환자실에 면회를 가면 외손자는 수많은 줄에 의지한 채 자가 호흡만 할 뿐이었습니다. ‘사은님, 제발 우리 외손자를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딸 내외가 너무 고통스러워했지만, 우리 가족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뿐이었습니다.
다행히도 딸 내외의 지극한 간호와 여러 인연의 정성스러운 기도로 외손자는 조금씩 좋아져서 퇴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사위가 다른 지역으로 발령이 나서 딸과 외손자가 잠시 우리집에 와 있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무엇이 불편했는지 보채고 울며, 먹는 것마다 토하고 힘들어해서 다시 병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일이 또 벌어졌습니다. 뇌출혈이 재발해서 수술을 해야 할 상황이 된 것입니다. 모든 희망이 한순간에 무너진 느낌이었습니다. 참회를 하고 또 하며 오로지 법신불 사은님께 매달렸습니다. 일할 때도 운전을 할 때도, 외손자를 위해 일심정성으로 기도하면 천의를 감동시킬 수 있다는 신념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의 위력은 호리(毫釐)도 틀림이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 외손자는 정말 많은 분들의 염원과 딸 부부의 정성스러운 육아와 치료로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네 살이지만 숫자도 100까지 세고 영어 공부도 좋아하고, 시키지 않아도 뭐든 혼자 씩씩하게 잘합니다. 교당에 가서 불전헌배도 잘하고 교무님들을 만나면 합장 인사도 잘합니다.
외손자를 위한 많은 분들의 기도와 정성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겠죠.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졌던 모든 일들은 사은님의 위력을 더 크게 느끼고 또 인연의 소중함도 깊이 느낀 경계였습니다. 역경 속에서 은혜를 조금씩 발견하다 보니 손주의 재롱이 삶의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 받은 은혜에 보은하며 공부하는 사람, 봉공하는 사람으로 거듭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법신불 사은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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