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을 울리자, 봄 여름 가을 겨울 없이
 
경자년 한반도에, 원불교에 바람이 분다.
파도가 인다. 준비한 자의 세계가 온다.

글. 여도언

해운대교당에는 장구가 여남은 개 있다. 
이 장구들은 유정은 교도가 일요법회 후 대법당에서 장구동아리 앉은반 교도들을 상대로 장구 장단을 가르칠 때 사용한다. 또 해운대교당 행복대학 학생들에게 장구의 리듬을 다듬어 줄 때도 이용한다. 더엉더쿵 덩더쿵~, 장구소리가 울려 퍼지면 나른한 오후의 교당은 훈목한 듯 깨어난다. 그런데 장구만으론 화음과 깊은 여운을 구성지게 표현하기에 부족하다. 북과 꽹과리와 징이 장구 옆을 함께 지켜주어야 음양이 조화를 부려 향기를 뿜어낼 수 있다.

이웃들에게 어깨춤 나게 하고, 신바람을 돋우려면 장구, 북, 꽹과리, 징이 함께 연주되어야 한다. 덕의 사물(四物)이 풍모를 갖추고 어우러져야 장구가 비를 뿌려 생명을 잉태하고, 북이 바람을 몰아 기를 불어넣으며, 꽹과리는 번개를 쳐서 하늘문을 열고, 징이 구름을 불러모아 천지를 일깨울 것이다.
교도가 자신의 교당을 돌보지 않아도 그의 교당이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을까. 몸과 떨어져 있고, 마음을 주지 않은 순간에도 나의 교당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자신의 눈에 교당이 보이지 않아도 교당은 당연히 그 자리에 서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왜냐면 교당은 그 자리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서 있다.”고 자신만만해 하는 그 교당은 지금 교당에 있는 교도들의 교당이지 그의 교당이 아니다. 내가 교당을 돌보고, 보고 있을 때에만 나의 교당은 현존한다. 태양 아래 또렷이 서 있는 일체생령도 그믐에는 그의 그림자조차 사라지고 만다.
몸이 멀어지면 사랑이 식는다. 사랑하는 사람도 헤어지면 관심 밖으로 사라진다. 내 관심 밖으로 밀려난 사람은 내게서 그 모습이 소멸한 상태가 된다.

바다가 바다다우려면 파도가 출렁이는 변혁을 품어야 한다. 그런데 물은 정적을 즐기려는 기질이 있고, 바다는 저절로 움직이지 않으려는 고집이 있다. 천지에는 공짜가 없다. 모든 것은 인과보응이고, 뫼비우스의 띠로 연결된 연기(緣起)이다. 변혁은 그저 그렇게 길손같이 찾아오지 않는다. 바다는 그래서 바람이 필요하다.
바람이 파도를 만들려면 먼저 지혜의 물을 만나야 한다. 태풍이 불어도 모래알뿐인 바다는 결코 파도를 만들 수가 없다. 물 없는 바다는 그저 사막이다. 바다가 물로 채워져도 바다라고 부르기는 아직 이르다. 파도가 더해져야 바다다운 바다가 된다. 파도가 일려면 물론 바람을 지고 오는 수고를 감당해야 한다. 물이 고이고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면 바다는 비로소 생명을 얻을 것이다.

누구를, 무엇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누가, 그 무엇이 더 나은 상태, 더 행복한 상태로 변화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마음이다. 사랑을 품는 순간, 마음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상대의 변화를 위해 자신은 더욱 애쓰고 노력할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무관심일 수가 없다. 사랑이라는 것은 그래서 마음보다 행함이 중요하다.
봄·여름·가을·겨울 없이 너와 내가 사물을 안고 연주를 해야 한다. 동으로 나아가며 장구를 두드리고, 남으로 오르며 북을 울리고, 서로 향하며 꽹과리를 치고, 북으로 내려가며 징을 때려야 한다. 사람들에게 사계의 신묘한 움직임을 듣게 하고, 사방을 울리는 천지의 음계를 보여주자. 경자년(庚子年)! 한반도에, 원불교에 화음이 울린다. 바람이 분다. 파도가 인다. 준비한 자의 세계가 정녕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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