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글. 윤자원 동대전교당

큰딸 가연이는 손재주가 좋아 그림도 잘 그리고 만들기도 곧잘 한다. 어느 날 딸이 아파트 분리수거하는 날에 큰 상자 몇 개를 주워 와도 되는지 물었다. 잠시 멈칫 하다가 “응, 그래. 그런데 왜?” 하고 물으니 “뭐 만들 게 있어서요.”라고 한다.
분리수거 하는 날, 퇴근해서 보니 커다란 상자가 세 개 놓여 있었다. 가연는 뚝딱뚝딱 상자를 자르고 붙이고 하더니 꽤 그럴듯한 집을 완성했다. ‘환상의 주스바’라고 쓰고 동생 호진이와 재미있게 가게 놀이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호진이가 “앗, 뜨거!” 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주스 가게를 멋지게 꾸미려고 바닥에 내려놓은 스탠드 전등에 호진이 손이 닿아 작은 화상을 입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나에게 바로 일어나는 마음은 ‘왜 스탠드를 바닥에 내려놓아서 동생을 다치게 한 거야!’ 하는 가연이에 대한 원망심이었다.
낑낑대며 상자를 주워 온 고마움, 그것을 공들여 멋지게 만든 것에 대한 고마움, 동생과 한참을 재밌게 놀아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은 이미 내 마음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잠시 멈추고 요란해진 내 마음을 보고 돌려세웠다.
호진이의 상처를 잘 치료하고 나니 내 마음이 평화로워졌고, 가연이도 상처받지 않았다. 역시 문제는 바깥에서 일어나는 경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처리하는 내 마음에 있음을 절실히 느꼈다. 원망이 일어날 때 감사로 돌리는 공부를 꾸준히 해 봐야겠다.

누가 주인이고 객인가?
글. 이세환 교동교당

전북교구 보은장터가 10월 12~13일에 열렸다. 우리 교당도 그간 정성을 다해 준비한 김부각을 즉석에서 튀기며 판매했다. 그렇다면 이처럼 물건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 주인인가? 사주는 사람이 주인공인가? 사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즉 소비자가 우선이다.
<대종경> 교단품 22장에 옹기장수와 지게를 지고 온 사람이 ‘각기 다 자기의 구하는 바만 구하였건마는, 결국에는 두 사람이 다 한가지 기쁨을 얻었으니, 이것이 서로 의지하고 바탕이 되는 이치로다. … 한 사람은 가게 주인이야 어떠하든지 자기가 살 물품만 실수 없이 사는지라 좌우 사람들이 모두 그를 옳게 여기며 실속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하더라. ….’라는 법문 말씀이 있다. 소태산 대종사님의 장 구경이 의미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거래가 잘 이루어져 기쁨을 얻기도 하고, 주인의 태도에 화내고 가버린 경우도 있음에 대하여 교당생활을 비교해 본다면, 교당의 주인은 누구일까? 물건(우리 法)을 소유하고 사용하는 사람이 주인이라면 우리가 모두 주인이고, 객이 따로 없다.
거래주객시(去來主客詩) : 거시주인 래시주인 거래무비주인(去時主人 來時主人 去來無非主人) / 동역객인 서역객인 동서무비객인(東亦客人 西亦客人 東西無非客人) ‘갈 때도 주인이요 올 때도 주인인데 가도와도 주인 아님이 없다 / 동쪽에서도 객이고 서쪽 역시 객인데 동서에 과객 아님이 없다’

각자가 둘이 아니고
글. 한광희 예비교무·원광대 원불교학과 4학년

복수전공을 하며 3년간 같이 수업을 듣고 있는 타과 학생들과 밥을 먹었다. 다들 4학년이기에 졸업 후 미래에 대한 말이 나왔다. 체육학과 친구들은 운동을 더 하거나 운동 크리에이터를, 경영학과 친구는 취업을 하겠다는 등 다양했다. 각자 미래를 그리며 그것에 맞게 준비하고 있었다.
문득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해주신 수행품 11장 법문 말씀이 생각났다. 세 사람이 앉아 있어도 무얼 하느냐에 따라 각각 큰 차이가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각자의 목표를 향해 여러 고민과 노력을 하는 모습이 이와 같지 않은가. 무엇을 생각하고 그리는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모든 사람이 너와 나를 구별하고 삶을 살아간다. 물론 법문 말씀의 대의와 다르나 그 각자가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는 점에서 떠올랐다. 출가 전엔 많은 사람의 속과 그 생각들을 알고 싶었고, 이 공부를 하면 다 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혹해서 들어온 것도 있지만 지금은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나는 그 모든 사람 중 한 명이지만 모든 사람과 생령을 관통하는 진리를 공부하고 있다. 둘이 아니기에 받아주고 인정하는 공부를 한다. 너도 나도 다를 게 없음을 알기에 작은 생각들이 점차 떨어져 나간다. 이 진리를 공부하고 알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운 일인지 안도감이 든다. 이것만으로 충분히 내가 선택한 이 길에 자신감이 생긴다.
‘이 문에 들어오길 참 잘했다. 이 공부를 하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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