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신비성, 언제까지 갈까?
인간의 욕망이나 나약함의 발로 아닐지… 21세기 AI시대에도 유효할까 의문

글. 박정원  월간<산>  편집장·전 조선일보 기자

스페인 여행을 다녀왔다. 모처럼 부부가 같이 갔다. 일로서는 여행을 많이 다니는 편이지만 일을 떠나 부부가 그냥 여행 그 자체를 즐기기 위해 떠난 기억은 별로 없다. 이번 스페인 포르투갈 여행이 그 중의 하나다. 일을 잊고 여행 그 자체를 즐기자고 마음먹고 출발했다. 하지만 카메라를 챙겨 든 순간 여행 그 자체를 즐기자는 마음은 뒷전이었는지 모르겠다. 역시 직업은 속일 수 없는 듯하다. 여행도 일이고, 즐기는 것도 일이 돼 버렸다. 여행 그 자체를 그냥 즐긴 기억이 제법 오래 전인데, 그냥 즐기기가 정말 쉽지 않았다.
이번 여행에서 일이 아닌 듯하면서 일로 만든 계기는 문화와 종교가 둘이 아닌 듯 어우러진 스페인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런 느낌이 든 것 같다. 그냥 일로서 갔던 이전 분위기와 비슷했다면 마냥 여행만 즐겼을 것 같은데 말이다.

스페인은 알려진 대로 가톨릭국가다. 현지인 얘기로는 국민 모두가 태어날 때 세례를 받는다고 한다. 뭔지도 모르고 으레 삶의 한 형식적 절차로 거치는 것이다. 거의 모두가 세례를 받고 국민 70% 정도가 실제 가톨릭을 믿는다고 한다. 국교로 선포만 안 했을 뿐이지 국교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실제 모든 도시에 볼거리라고는 성당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방팔방 눈에 띄는 건 성당이다.

그런데 하나의 신기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모든 성당마다 종교의 신비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기이한 절벽 같이 생긴 몬세라트산 옆에 어떻게 건립했을까 궁금증부터 자아내는 몬세라트성당의 검은 성모 마리아상은 스페인의 3대 순례지로서 성모 마리아의 손을 잡고 기도하면 소원 한 가지는 들어준다는 신화가 전한다. 기독교 포교를 위해 스페인 사라고사를 걷고 있을 때 지친 야고보를 일으켜 세운 지팡이가 있다는 사라고사 필라 성모 대성당, 세계적인 건축가 가우디가 설계해서 100년 넘게 공사하고 있다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사그라다 파밀리아(성 가족) 대성당, 스페인 내전 중 발사한 폭탄 두 개가 성당 안에 떨어졌으나 모두 불발탄이 됐다고 전하는 동시에 그 폭탄을 성당 내부에 전시하고 있는 필라 성모 대성당 등등 성당마다 신화 같은 내용들로 가득하다.

우리식으로 하자면 갓바위불상이나, 그와 유사한 불상을 대웅전에 봉안해놓고선 ‘절에서 열심히 기도하면 소원 한 가지는 꼭 들어준다.’는 플래카드를 걸어놓고 신도를 유인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아 보였다. 과연 맞을까 하는 생각보다 이러한 종교의 신비성이 결국 성당을, 아니 종교를 존속시키는 힘이겠구나 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결국 인간이 할 수 없고 볼 수 없는 초인적 힘을 가진 존재에 인간이 의존하는 게 종교인가 하는 점을 떠올리게 했다. 
종교는 신비성이 없으면 유지되지 않을까? 과연 인간이 언제까지 종교의 신비성과 이적성에 의존해야 할까. AI가 지배하는 21세기에도 그 신비성이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종교는 수천 년 동안 그 신비와 이적으로 세상을 지배해 온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모든 현상은 순환한다는 동양 종교적 내지는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과연 미래의 세계도 유효할까 의문이 드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종교의 신비성과 이적성은 사실 원시 샤머니즘의 유산이다. 과학으로 해결하지 못한, 아니 과학이 없었던 그 옛날 수많은 자연현상에 대해 인간은 나약한 존재로서 절대자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래서 절대자는 인간이 만들어 숭배했다. 그런 시대의 신비성과 이적성이 현재 유지되고 있는 종교들의 힘인 걸까? 그렇다면 미신과 무엇이 다를까?
그 신비성과 이적성의 사실 여부를 차치하고 혹시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현상을 신화화하고, 그 신화화 된 상징이 종교를 유지시키고, 그 종교를 유지시키는 종교성이 다시 신화를 창조하면서 종교가 전승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신화를 보충하는 게 인간의 기록이고, 그 기록은 문자로 대체된다.

사실 인간이 문자를 발명한 이후 신화는 더욱 가속화된다. 이건 분명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인간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자연)현상을 문자로 정확히 기록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문자가 인간의 의식이나 사고를 전부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엄청난 착각이다. 문자나 언어는 인간의 의식이나 사고, 가치체계의 일부만 반영할 뿐이다. 문자는 실제로 현실, 즉 실제를 반영하지 못한 허구적 실제와 현실적으로 발생했으면 하는 희망적 사고로 이뤄진 세계의 산물이다. 신비화와 이적성을 다르게 표현하면, 진실과 허구의 절묘한 균형이 지금 종교를 지탱하는 힘이 아닐까 한다. 결국 인간이 밝히지 못했거나 일어났으면 좋을 허구적 세계를 인간이 신비화해서 만들어낸 그럴듯한 팩트로 이뤄진 가치체계인 셈이다. 과학은 검증가능한 사실관계, 즉 팩트를 밝혀내지만 종교는 그 팩트의 시공간을 뛰어넘는 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현재 형태의 종교가 지속하는 한 신화는 세세생생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구조가 지속되는 한 신화는 인류를 계속 지배하고, 과학은 그런 신화를 더욱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

과학은 절대 종교를 따라올 수 없다. 종교는 팩트로서의 과학을 이용할 수 있지만 과학은 가
치와 믿음을 중요시하는 종교를 이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원불교는 어떤가? 과학인가, 종교인가? 신비성과 이적성을 배격하고 지극히 과거 종교의 한 구성요소인 도덕적 관점에서만 세상을 보라고 한다. 도덕적 생활은 인간의 영성(靈性)을 더욱 밝혀 영생을 살 수 있다고 강조한다. 어떤 종교가 더 합리적이고 미래지향적인가?

저작권자 © 월간원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