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지사 10명하고도
안 바꾼다.”

이동안은 일찍이 전무출신을 나와 김제 서중안의 건재약방에서 한약재를 익히고 약방운영에 대한 경험을 쌓고 익산총부에 들어왔다. 그의 경영능력과 경험은 본관 서무부장을 시작으로 농업부장, 상조부장, 공익부장, 육영부장직을 거치는 등 탁월한 성과를 내며 그간 익힌 경험으로 새 회상의 미래를 열고 책임질 보화당에 포부와 사업 역량을 온통 쏟았다.

보화당은 원래 치심당(治心堂) 한약방을 인수하여 개업하였다. 도산 이동안은 개업 전에 전 주인으로부터 인수 받은 약재 중 변질된 것은 모두 불살라버렸다. “부패한 것을 어찌 약이라 쓸 것이냐. 비싼 약재라도 다 태워버려라.” 도산은 매년 비축하여 놓은 건재약을 재고 정리하고 부패한 것이 있으면 가려냈다. 고객들 보는 앞에서 소각시켰다. 비싼 약재를 불태워버렸다는 소문이 돌자 보화당은 신뢰를 받게 되었고, 날이 갈수록 매상은 올라 발전 일로에 올랐다.
한 번은 상당히 이익이 나는 약재를 부산에 내려간 길에 사왔던 일이 있었다. 이를 두고 소태산 대종사(이하 대종사)가 말하였다. “공중사는 단독 처리 하는 게 아니다. 이번 일로 너는 큰 이익을 냈지만 뒷날에는 10중의 8~9는 손해 보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 말을 들은 도산은 즉시 부산으로 내려가 물건을 물리고 왔다. (중략)

경성 도매 건재상 천일약업사는 전국 각지의 약방과 거래하였는데 1년에 한 차례 거래처의 대표들에게 외국 여행을 시켜 주었다. 도산은 천일약업사의 경비 부담으로 금강산과 북경을 시찰한 바 있다.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도산은 일본과 중국을 돌며 견문을 넓혀 중국제 한약재 수입을 생각하게 되었다. 각지에 무역할 계획을 수립하고 그 구체적인 계획안을 내놓았다. 그 자금 마련에 있어서는 회중 자산을 저당 잡히는 쪽으로 검토하였다. 이에 대해 일산, 사산, 팔산 등이 “아먼, 그래야 되지야.” 하고 찬성하고 매우 호응이 좋았다. 그러나 대종사의 생각은 달랐다.

“동안이의 계획대로라면 꼭 성공을 하제. 나도 그렇게 생각 혀. 이 일은 동안이나 내가 있을 때는 잘 될 것이여. 그러나 후일에 이 일을 본받아 큰 일을 저지를 수도 있을 것이니 그만 두어라.”
대종사는 또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동안이나 나나 수백 년 사는가 하면 그렇지 않혀. 살기로 하면 백 년은 더 못 살아. 그러나 우리 뒤에 어떤 사람이 교단을 저당 잡히고 사업을 하다가 혹 실패하면 그 욕은 누구에게 돌아오겠는가. 일이 생기면 우리들 죄만 남아. 천추에 욕이 되네. 이 회상은 보화당이 돈 벌어서 유지할 그런 회상이 아니야. 만년은 나갈 회상이야.” (중략)
도산의 열반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갑자기 덮친 불행이었다. 돌림병 염병(장티푸스)이 창궐하여 산업부원 13명 중 12명이 전염되었다. 그 중 도산이 가장 심해 장티푸스가 황달로 악화되었다. 대종사는 도산이 위독해지자 매일 산업부를 다녀갔다. “우리 동안이를 살려줄 의사만 있다면 불법연구회 절반을 주겠다. 어떤 의사가 와서 동안이를 살려놓을 거냐.”
비통한 얼굴에 한탄을 하며 차마 자리를 뜨지 못하는 대종사의 모습을 가까이서 본 제자들은 가슴이 뭉클하며 가슴이 막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대종사는 도산의 손을 잡고 위무하였다. “동안이, 나 만난 이후로 누구보다 제일 꾸중을 많이 듣고, 누구보다 제일 고통 받은 이는 자네 밖에 없을 것이네. 이것이 사제지간의 정의지만 자네가 먼저 가 마음이 아프네.” “종사님 앞에 먼저 가니 이같이 죄송스러운 일이 없습니다.” 도산은 눈물을 흘리며 더 말을 잇지 못하였다.

다음 날, 도산을 떠나보내며 대종사가 뜰 앞에 서서 설법을 하자 도산은 장남 광오의 부축을 받아 앉았다. “다 잊어버리고 가게. 자네가 지혜력은 약간 모자라지만 심리 쓰는 것은 법강항마부보다 솟네.” 이로써 도산 이동안은 대종사로부터 생전에 정식 법강항마위로 인정받았다. 그가 열반한 일자는 원기 26년 5월 8일 오후 3시 반이었다.
도산이 입적하자 대종사 한동안 묵념한 뒤 눈물을 흘렸다. “너무 상심 하지 마옵소서.” 제자들이 대종사를 위로하자 대종사는 심회를 털어놓았다. “마음까지 상하리마는 내 이 사람과 갈리면서 눈물을 아니 흘릴 수 없다. 이 사람은 초창 당시에 나의 뜻을 전적으로 받들어 신앙 줄을 바로 잡았으며, 그 후 모든 공사를 할 때도 직위에 조금도 계교가 없었니라.”

5월 10일 오전 11시 30분에 대각전에서 발인식이 거행되었다. 천도법문을 하다가 대종사가 소리 내어 흐느끼자, 대중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대각전 마루에 막 뒹굴었다.
대종사의 도산에 대한 신임은 너무 두터웠다. 대종사가 도산에 대해 되뇌는 말이 있었다. “도산하고 전남지사 10명하고 안 바꾼다.”

도산 이동안 대봉도는 …
● 1892년 12월 2일 전남 영광 출생
● 원기 8년(1923)년 10월 1일 출가
● 불법연구회 농업·상조·산업부장 / 보화당 이사 / 수위단원 역임
● 법랍 17년
● 정식 법강항마위
● 원기 25년(1940) 5월 8일 열반
● 원기 49년(1964) 대봉도 추서

도산 대봉도는 1892년 12월 2일에 전남 영광군 묘량면 신천리에서 부친 이경현 선생과 모친 김남일화 여사의 7남매 중 2남으로 출생하였다.
누구보다도 사업역량이 뛰어났던 도산 대봉도는 농촌운동가로서 향리인 신흥마을에 야학을 실시하여 문맹퇴치에 힘썼고, 상조조합을 만들어 농민들의 생활을 향상시켜 마을을 모범마을로 만들기도 했다. 도산 대봉도가 원불교를 알게된 때는 원기 3년 27세 때였다. 사촌형님인 일산 이재철 종사의 인도로 직접 영산 길룡리에 찾아가 소태산 대종사를 뵙고 사은 법문을 받든 후 마음속에 환희심이 일어나 그 뜻을 굳혀오다 원기 8년 10월에 전무출신을 단행하게 되었다. 소태산 대종사의 지시에 따라 신천리에 수신조합을 조직하고 허례폐지·미신타파·근검저축 등을 장려하여 가족주의와 이기주의를 초월하여 공익사업의 이타행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도산 대봉도는 출가 후 뛰어난 사업역량에 바탕하여 총부 서무부장·농업부장·농업상조부장·영산상조부장·공익부장·육영부장 등 여러 분야에서 헌신봉공으로 오롯이 바쳐 사업분야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빈약한 자본을 가지고도 근검절약과 용의주도한 경영적 수완을 소유하여 하는 일마다 번창했다. 보화당 역시 소자본으로 경영하게 되어 실로 미미한 존재였으나 나날이 발전하여 많은 이익을 내어 익산 군내에서 건재약국으로는 단연 왕좌를 점했다.
덕을 말하고 덕을 베풀며 살았던 도산 대봉도에게는 권위의식이나 상하의 구별이 없었다. 어떠한 어려운 사업의 시작도 도산 대봉도의 지도라면 능히 이루어졌고 심중의 답답함을 풀어주는 포근한 자비의 화신이었다. “전무출신의 가정이 잘 되어야 공사에 지장이 없을 것이다.” 라며 틈틈이 전무출신 사가를 보살펴 주었고 상담자가 되어 주었다.
원기 12년에는 신천리 수신조합을 해체하여 본교 총부재단에 편입시키고 총부건설에 힘을 다했으며 보화당을 설립하는 등 교단 사업개척의 선구자적 역할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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