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無)와 유(有)는 같은 데서 나왔지만
이름을 달리해 현(玄)이라고 말한다


글. 김정탁

지난 호에 “무(無)는 천지의 시작을 말하고, 유(有)는 만물의 어머니를 말한다. 그래서 늘 무(無)로써 만물의 오묘함을 보고, 유(有)로써 만물의 명료함을 보고자 한다.”에 대해 설명한바 있다. 이제 <도덕경>은 “무(無)와 유(有)는 같은 데서 나왔지만 이름을 달리해 이런 같은 걸 두고 현(玄)이라고 말한다.”로 규정한다. 노자는 어째서 무와 유가 이름을 서로 달리해도 같은 데서부터 나왔다는 걸 두고 현이라고 규정하는 걸까?  

노자의 이런 주장을 이해하려면 지난 호에 무(無)와 유(有)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동원한 점(●)을 중심으로 해 커져 나간 원(○)의 그림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점은 무(無)의 상태를, 원은 유(有)의 상태를 뜻한다. 왜 그러한가? 천지가 처음 시작할 때는 마치 점의 모습을 띠고 있어서이다. 사실 천지가 처음 시작할 때 만물은 그 모습을 제각각 드러내지 않은 채 작은 점안에 모두 모여 가능태로서 혼재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점안에 모두 모여 있는 혼재된 상태에서 만물의 오묘함(妙)을 볼 수 있다. 그렇더라도 만물은 그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 없어 마치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이므로 노자는 이를 두고 무(無)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서 점이 원으로 점차 커지면 만물은 보다 구체적인 모습을 지닌다. 아주 옛날 침팬지가 지금 사람과 원숭이로 나누어져서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구분은 원이 커질수록 원의 가장자리가 늘어남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즉 늘어난 가장자리에 사물이 보다 구체적인 모습, 즉 명료한() 모습을 하면서 위치해서이다. 그 결과 사물의 종류는 천지간에 늘어나게 마련이다. 이런 과정이 만물의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므로 노자는 이를 두고 유(有)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만물이 점(●) 안에 가능태로 있어 오묘한 상태로 있든지, 아니면 원(○)의 가장자리에 있어 명료한 상태로 있든지 그 모습만 달리할 뿐 실제로는 같다. 즉 시간을 한없이 거슬러 올라가면 점안에 속하게 되고, 시간이 한없이 흐르면 원의 가장자리에 위치하게 된다. 그러니 시간상의 차이에서 오는 위치의 변화일 뿐 그 근원은 같은 데서 출발한다. 노자는 이를 두고 “무와 유는 같은 데서 나왔지만 이름을 달리한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노자는 무와 유가 이름을 서로 달리 해도 같은데서 나왔기에 이런 같음을 두고서 한
마디를 더 거든다. 그것은 현(玄)의 개념으로 표현된다. 노자는 어째서 이를 두고 현이라고 규정할까? 사람들은 현을 두고 ‘검다’ 내지는 ‘가물거리다’로 풀어서 해석하는데 굳이 이렇게 해석할 필요는 없다. 도(道)를 두고 따로 해석하지 않듯, 현도 따로 풀이하지 않고 그냥 놔두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다. 도와 마찬가지로 현도 노자가 고유명사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자는 이 상태를 두고 왜 현으로 규정했을까? 노자의 이런 의도를 간파하려면 <천자문>의 시작부인 ‘천지현황(天地玄黃)’, 즉 ‘하늘 천 따 지 가물 현 누를 황’의 내용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천지현황’은 하늘은 현(玄)하고, 땅은 황(黃)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하늘은 현하고, 땅은 황할까? 먼저 하늘을 쳐다보면 하늘이 왜 현한지 실마리가 풀린다. 하늘은 동서남북 어느 쪽이든 똑같이 푸르기에 경계와 구분을 찾아내기가 힘들다. 이를 두고 가물가물하다고 말하는데 하늘이 그만큼 그윽한 탓이다. 이것이 현의 상태이다. 물론 밤이 되면 경계와 구분이 더욱 모호해지므로 현의 의미가 ‘검을 현’까지 확장된다.

반면 땅에선 모든 것들이 환히 드러난다. 그래서 산과 구릉, 강과 천, 늪과 호수 등이 우리 눈에서 확연히 구분된다. 동아시아인은 이런 상태를 누렇다고 여겨 땅을 황하다고 규정한다. 천지의 원리, 어쩌면 동아시아판 자연과학의 원리는 이처럼 현과 황의 대비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렇지만 노자는 황(黃)보다는 현(玄)에 보다 큰 방점을 둔다. 그래서 자신을 ‘드러내는’ 땅(地)보다는 자신을 ‘감추는’ 하늘(天)을 보다 이상적인 상태로 설정한다. 이는 어쩌면 동아시아인이 최고의 존재를 오랫동안 ‘하느님(하늘님)’으로 여겨온 것과 긴밀히 연결된다.

이제 노자는 우주·자연의 원리가 너무나 현하다고 여겨 “현하고, 또 현하다.”라고 또다시 새삼스레 강조한다. 그러면서 이를 두고 중묘지문(衆妙之門), 즉 많은 오묘함이 깃드는 문으로 규정한다. 여기서 우리는 ‘많은 오묘함’보다 ‘문’에 방점을 두고 해석해야만 ‘많은 오묘함’이 무얼 뜻하는지 쉽게 밝혀낼 수 있다. 만약 ‘많은 오묘함’에 강조를 두고 해석한다면 그 해석은 단어가 외재적으로 지시하는 범위를 넘어서지 못한다.

노자는 ‘현’을 설명하기 위해 왜 ‘문(門)’이란 개념을 도입했을까? 한번 문과 반대되는 역할인 벽(壁)을 생각해보자. 벽은 공간을 이쪽과 저쪽으로 구분한다. 반면 문은 벽의 이쪽과 저쪽이 서로 통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문에선 이쪽과 저쪽의 구분이 없다. 즉 이쪽도 될 수 있고, 저쪽도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의 공간에선 무(無)와 유(有)의 구분도 생겨나지 않는다. 즉 문은 무도 될 수 있고, 유도 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다. 따라서 벽에 의해 이쪽과 저쪽이 고정된다고 해도 문은 이쪽도 될 수 있고 저쪽도 될 수 있는 교집합의 공간에 해당한다.

교집합의 공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언어철학과 관련해서 우리에게 중요한 점을 시사해 준다. 지금까지 우리는 언어가 모든 걸 정확히 표현한다고 굳게 믿어왔다. 그래서 언어에 대해 한없는 신뢰를 보여 주었다. 언어로 모든 걸 객관적이며 명료하게 묘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이런 신뢰가 싹텄다고 본다. 특히 서구철학은 이런 믿음 하에서 자신의 논리를 오랫동안 펴왔다. 그래서 ‘서구철학의 아버지’를 ‘플라톤’으로 규정하며, ‘서구철학의 아버지’란 기의(記意, signified)와 ‘플라톤’이란 기표(記表, signifier)는 정확히 일치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는 기의와 기표 관계를 ‘기의=기표’로 파악하는 일에 해당한다.

이런 신념은 일상의 언어에서보다 법(法)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왜냐하면 동일한 범죄(기의)인데도 다른 형법(기표)을 적용할 때 형량이 서로 달라져선 안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형법 1조를 적용하면 징역 10년에 해당하는데 형법 2조를 적용하면 징역 1년에 해당하는 경우가 생겨나선 안 되어서이다. 이 때문에 법에선 의미의 ‘상호배타성(inter-exclusiveness)’이 엄격히 적용되고, 이것이 곧 법학의 핵심에 속한다. 그래서 법학은 결국 벽(壁)이 하는 역할처럼 범죄의 의미를 이쪽(형법 1조)과 저쪽(형법 2조)으로 확실히 구분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세상사는 꼭 그렇지 않다. 문(門)의 역할처럼 의미가 배타적이지 않고 서로 중복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래서 이쪽의 의미도 담겨지고, 저쪽의 의미도 담겨진다. 예를 들어 선악(善惡), 미추(美醜), 호불호(好不好)의 정도가 정확히 구분되는 게 아니라 서로 공존하는 영역이 분명히 존재한다. 즉 선이면서 악인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더욱이 선과 악은 상대적 가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절대적 가치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정도의 차이일 뿐 선과 악을 모두 지니게 마련이다. 따라서 ‘기의=기표’의 관계는 사실상 불가능하고, ‘기의≒기표’의 관계만 성립할 뿐이다.

노자는 이를 두고 “도(道)를 도라고 하면 늘 그런 도가 아니고, 이름(名)을 이름이라고 하면, 즉 적합한 이름이라도 늘 그런 이름이 아니다.”라고 표현한다. 즉 도라고 정확히 표현해도 도를 표현하는 게 아닐 때가 분명히 있다. 그래서 ‘비상도(非常道)’, 즉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마치 ‘비상문’이 문이긴 하지만 특별할 때 사용하는 문인 것처럼 ‘비상도’도 도이긴 하지만 도가 아닐 때가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 호에 이어진다. 
Ι교수·성균관대학교 소통학. smilejtk@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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