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막의 전통에 따른
삼밭재 초막

글. 이정재

초막의 전통은 여하한지도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선 초막 건립을 최초로 제안했던 이가 누군지가 궁금하다. 처사일화는 처화가 원했다고 하였으나 앞서 보았듯이 그럴 여유와 상황이 아니었음이 밝혀졌다. 초막을 처화가 제안하여 된 것이 아니라면 초막 건립의 최초 발상에 대한 것이 재고되어야 한다. 처화가 아니라면 부친이어야 하는데 부친은 아들에 대한 더 이상의 방황을 허용할 수 없던 상황이었으니 그도 불가하다. 방황을 유도한 수행공부를 다시금 하라고 초막을 주선할 리 없기 때문이다. 초막 건립은 그를 담당했던 모친 쪽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외가는 독경처를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던 것은 아니었다.

초막 제안에 대한 합리적인 추정은 처사일화를 주도했던 ‘처사 제안설’이 유력한 것이다. 보다 효과적인 내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급선무이고 내림 이후 학습무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를 처사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사는 부친과 가족의 급박한 사정을 반영하여 초막 건립에 대한 것을 건의하였고, 부친은 이를 수용하고 곧바로 부인을 통해 외삼촌에게 부탁을 하였던 것이다.
사실 이런 류의 독공은 당시로서 널리 알려진 공부법이었다(팔산의 예에서도 알 수 있다). 고도의 집중을 요구하고 주변과 동네에 끼치는 소음을 줄이는 공부법으로, 격리된 상태에서의 독공의 방법은 당연한 것이었다. 초막 건립의 동기는 처화가 아니라 처사와 가족의 합작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잠시 초막에 대한 민속지식을 살펴보자.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는 이 초막의 쓰임새가 여럿 나오기도 하고, 화전민이 살던 초막에 관한 기록도 널리 발견할 수 있다. 조선대 여항문인(閭巷文人)들이 산 가까이에 집을 짓고 모름지기 담장 없는 초막을 지어 산과 자연을 취하여 들여놓고 한가로이 풍류를 즐기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김광선처럼 건넛산에 초막을 지어놓고 도술 공부에 정성을 들인 경우도 많았다. 기도와 관계된 전통은 다른 나라나 종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배용어에도 초막이 있다. 즉 초막 풀이나 짚이나 나뭇가지 등으로 지붕을 이은 작은 임시처소(레23:42, 마17:4 등 다수). 한편 초막은 상징적으로 하느님의 백성의 자유와 해방(레23:42~43)을 나타내며, 또 환난 중에 주어질 하나님의 비밀과 절대적인 보호를 의미(시27:5)하기도 한다는 긍정적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또 조선시대는 초막 대신 가가(假家)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집의 이동을 위하여 헐고 옮기기 쉽도록 임시로 짓던 여막, 초막, 뜸집 등의 원초적인 형태의 건축물이라 정의된다. 개념이 넓은 만큼 쓰임새도 다양했다. 시가지 난전의 경우, 군인들이 번을 칠 때, 집이나 도로를 만들 때 감역관들의 임시 거처 등이다. 집을 지을 때는 이엉이나 솔가지, 띠 등을 써서 짓는데, 보통 단칸이며 문짝이나 들창이 따로 없고 맨 바닥인 것이 보통이다. 공사장에서 햇볕을 가려야 할 때는 벽체 없이 지으며, 거처를 위하여 지을 때는 벽체를 설비하기도 한다.

삼밭재에 건립한 초막이 이런 옛 전통을 어느 정도 이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수행을 목적으로 한 초막의 쓰임새는 분명했던 것 같다. 이는 근래에 있었던 계룡산 일대 초막촌에서 증명된다. 초막의 형태가 통일되게 나타나진 않지만 기도나 독공을 위한 임시거처라는 공통의 기능은 같다 할 것이다.

이런 초막의 다양한 쓰임새는 훗날 암자, 식당, 주막 그리고 정자나 누정 등으로 안착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사실 삼밭재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고 현재 그 터에는 정을 건립하여 기리고 있다. 소태산이 제자를 시켜 구해본 금강경 목판본도 이런 초막과 관련이 있다. 독경용 금강경목판을 찍어 내던 불갑사의 암자도 이런 수행을 위해 지었던 초막의 발전된 형태였다.
초막 건립에는 적어도 몇 사람의 인원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에 드는 비용도 어느 정도는 요구되었을 것이다. 목재나 지붕 기와 그리고 내장재 등을 모두 산에서만 조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초막이라 해도 한두 칸 집의 규모를 갖추려면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기록대로라면 수간의 집이 되어야 한다.

‘박성삼 열반 전년에 대종사를 위하여 전일 기도장소인 마당바위 부근에 수간의 공부실을 구축하셨고’
수간이라면 적어도 2~3칸 혹은 3~4칸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러나 독경수행만을 위한 공간이라면 단칸으로 충분하다. 만약 수 간이라면 다른 용도가 더 추가되어야 한다. 초막의 용도와 초막의 사용 기간도 미리 계산을 하였을 것이다. 독경수행에 관한 것이라면 장기 사용 계획안을 요하지 않겠으나, 신당의 규모를 갖추어야 했다면 장기화를 대비한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갖추어야 했을 것이다. 이 경우는 취사도 해결해야 하고, 아울러 침식을 위한 난방장치도 필요했을 것이다. 앞서 보았듯 초막의 기능상 그렇지는 아니했던 듯하다. 서대원 선진이 답사를 한 결과 어떤 돌이나 주춧돌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하였기 때문이다. 주춧돌도 없고 구들의 흔적도 없음은 난방이나 겨울 용도가 아니고 잠시 몇 달을 머무는 정도, 즉 어느 정도 풍우를 가릴 정도의 집으로 봐야할 것이다.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지붕의 틀을 얹은 다음 벽을 산 아래에 있는 갈대를 잘라 엮어 붙였을 것이다. 지붕 또한 갈대를 엮어 비가 새지 않을 정도의 처리를 하였을 것이다. 출입하는 문 역시 갈대를 활용하여 만들 수 있다. 막 안의 바닥은 짚이나 갈대를 깔아 판판하게 하였을 수도 있었겠으나, 이 부분은 독경 수행에 부합해야 하므로 좀 신경을 기울여 조작하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적어도 마루를 장만하여 책과 독경 도구들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하였을 것이라 판단된다. 내림의 경우를 감안할 때 무구(巫具)나 관련 도구 같은 소중한 물건들을 설치할 공간도 따로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다. <대종사약전>에서처럼 그 시기가 늦가을 철이라면 추위에 대비한 최소한의 난방장치 즉 숯 화로 정도는 구비가 되어있어야 했을 것이다.

초막은 크지 않은 단칸의 집으로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고, 크기는 한두 평 정도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밖에서 보았을 때 그래서 마치 삿갓을 쓴 모양을 한 것이다. 이를 미루어 볼 때 기둥이 그리 높지 않았을 것 같다. 산속에서 기둥이 높아 봐야 바람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방에도 유리한 낮은 삿갓의 모양이 나온다.

음료용 물, 대소변, 간단 취사, 수면을 위한 도구와 세면도구 등도 추정할 수 있다. 그곳이 예전에는 절터였기 때문에 물은 문제가 없었을 터이다. 대소변도 주변 외진 곳에 땅을 파서 쓰면 된다. 간단한 취사는 적어도 솥과 식기가 있어야 하고 반찬도 있어야 했겠으나 간소한 식사를 주로 하였을 것이다. 기도와 구도의 과정은 한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행의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먹고 입고 자는 것을 간소하고 구차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다. 그것은 정신을 통일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고 지금도 그 전통은 전해온다.

“그리하야 처음에는 생활에 대한 계교심도 혹 있었고 고생이라는 늣김도 혹 있엇지만은”
2차 삼밭재 기도는 <창건사>의 이 구절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처사일화로 비롯되었던 것이었다. 1909년 초 첫 아이의 탄생, 가장으로서의 집안 살림에 대한 책임과 정착 압박감, 조승지의 병과 타계로 인한 집안의 경제문제, 강증산의 타계 등의 총체적 난국이 도래하였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부친의 결단은 ‘처화의 처사만들기’였고, 내림 이후 당연히 이어지는 독경연마의 증거가 초당 삿갓집이 되었던 것이다. 대각 후 제자들은 이를 기려 수도실, 공부실 혹은 정사 등으로 격상된 명칭을 부여하게 된다. Ι교수·경희대학교 민속학연구소장. hogo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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