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천직은?

글. 김인화

내가 살던 고향은 전북 순창이었다. 가물가물한 기억이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 아침 방송 시간에 방송실에서 노래를 부르던 생각이 난다. 그때는 내가 노래를 잘하는지 못 하는지도 몰랐지만 그저 노래를 하는 것이 좋아서 씩씩하게 노래를 부르면서 학교에 다녔다.
중학교에 진학을 하고 보니 특별활동 시간에 합창부, 서예부, 무용부, 농구부, 배구부 등 많은 동아리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중학교 1학년까지만 해도 키가 작았던 나는 늘 맨 앞자리에 앉았는데,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키가 훌쩍 자라 운동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많이 들어왔다.
배구부에서는 배구부로 오라고 하고, 농구부는 농구부대로 농구부로 오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정작 활동을 하고 싶었던 동아리는 합창부와 무용부였다. 그래서 이런저런 스카우트 제의를 다 물리치고 합창부와 무용부에서 활동을 했다.
한번은 무용부 발표회를 앞두고 선녀춤을 추게 되었다. 선녀춤은 두 명이 추는 춤이었는데 나와 짝이 된 아이는 온주라는 친구였다. 그런데 온주가 연습을 하다가 순서를 틀리는 바람에 지도 선생님에게 손바닥 10대를 맞게 되었다. 친구의 실수로 인해 손바닥을 무려 10대나 맞았으니 얼마나 억울했겠는가. 온주에게 잔뜩 화가 난 나는 짝의 얼굴을 마주보고 웃어야 할 대목에서 외면을 했다가 지도 선생님에게 다시 한번 혼이 났다.
모두 지난 일이지만 지금 와서 생각을 해보면 내가 특별히 잘하는 일은 없었던 듯하다. 다만 무엇이든지 한번 맡아 하게 되면 그것을 천직으로 알고 할 뿐이다.
그동안 교당에서 활동을 했던 합창단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일이라는 사명감으로 열심히 해왔다. 교화를 하는 데 있어서 교무님의 말씀도 중요하지만 문화 교화도 중요한 교화의 방법이다. 그동안 생활 환경의 변화에 따라 몇몇 교당을 옮겨 다니며 합창단을 만들고 문화교화에 이바지를 하려고 노력을 해왔다.
앞으로 남은 세월도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이곳이 꽃자리라는 마음으로 언제 어느 곳에서나 보은하는 삶을 살아갈 것을 다짐해 본다. 앞으로도 문화교화에 더욱 노력해야겠다.

‘법신불 사은이시여!!
불제자 인화에게 크신 광명과 힘을 내리시어
제 발길 닫는 곳 제 손길 미치는 곳마다 보은하며 살 수 있도록
은혜와 힘을 주시옵소서.
제가 하고자 하는 이 일을 천직으로 알고 열심히 보은하며 살겠습니다.’

큰언니의 큰 사랑

글. 김순신

나의 큰언니는 처녀 시절부터 8남매 중 막내인 나를 업어 키우셨다. 그 시절 특히 우리 동네는 가난한 동네였는데, 언니는 보따리 옷 장수를 만나면 한 번도 지나치지 않고 언제나 나에게 예쁜 옷을 사 입혀서 친구들에게 부러움을 샀던 기억이 난다.
언니는 결혼하여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철없는 막내를 데리고 살았다. 나의 여고 시절과 대학교, 그리고 직장생활과 결혼까지, 아니 지금까지도 언니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다.
내가 결혼하여 분가한 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명절이나 집안 행사가 돌아오면 항상 나보다 더 바쁘고 신경을 쓰는 것은 언제나 큰언니였다. “나는 너를 내 몸 빌려서 낳아 주기만 했지, 큰언니가 다 키웠으니 나보다 큰언니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 어머니는 늘 못이 박히도록 내게 말씀하셨다. 친정어머니는 내가 둘째 아이 만삭일 때 우리 곁을 떠나셨는데, 그 빈자리마저 못 느꼈을 정도로 큰언니는 내게 큰 사랑을 베푸셨다.
큰언니가 오랫동안 운영하던 총부성지 옆 ‘고향마을’ 식당을 얼마 전에 접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보은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얼마 전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쏟아지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큰언니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것이다. 위로 오빠가 두 분이 있어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고, 더불어 동생들을 보살펴야 하는 큰언니의 무거웠을 그 어깨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이제부터 나의 삶을 큰언니에게 보은하는 시간으로 채우고 싶다. 큰언니가 한없이 베푼 큰 사랑이 헛되지 않게 해드려야겠다.
내가 세상 어떤 사람보다도 큰 사랑을 듬뿍 받고 성장하였듯이 감히 그 사랑의 크기를 가늠할 수도 헤아릴 수도 없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작은 것부터 보은하는 연습을 하며 살아가 보자. 손이 필요하면 손이 되어 드리고, 발이 필요하면 발이 되어 드리며…. 소소하지만, 절실히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잘 살피고 잘 돌봐드리며 살아야겠다.

보람 있게 잘 사는 법

글. 남성제

대전에 살다가 이직을 하면서 2016년에 춘천으로 왔다. 2월 초에 이사를 왔고 2월 말에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적응하느라 처음에는 정신없이 살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저런 불만이 많이 쌓이고 왠지 모르게 마음도 허전했다. 교당을 자주 나가기 위해 춘천교당으로 적을 옮기고 올 1월부터 꾸준히 다니기 시작했다. 법문도 듣고, 금요공부방에서 공부도 하면서 생활이나 심경의 변화가 많이 생겼다.
첫째, 나는 삼학 중 ‘취사’가 가장 어렵고 실천이 안 된다. 하루를 돌아보면 습관에 끌려 행동하는 경우가 많고, 내일은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해도 또 똑같이 행동하는 것이 반복된다. 자책도 많이 했다. 그러다가 ‘마음 작용하는 법’을 주제로 한 금요공부방에서 교감님의 말씀을 듣고, 취사를 할 때는 항상 먼저 마음을 멈추어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둘째, 그렇게 올라오는 마음을 멈추고 고요한 마음으로 취사를 하면 자연스럽게 불공이 되고 은혜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전에는 학생들이 잘 못하거나 답답한 모습을 보이면 화를 냈고, 왜 저것 밖에 못하나 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많이 났다. 마음 작용하는 법을 배우고 나서는 전에는 보이지 않던 상대방의 관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입장이 이해되어 격려하고 보듬어주었더니 스스로 더 열심히 하고, 결과도 훨씬 잘 나오고 있다. 또 아들, 딸과의 관계에서도 화내고 다그치기보다는 차근히 타이르고 기다려주니 저지레가 줄어들고, 유대감도 훨씬 더 강해졌다.
셋째, 나는 내 마음에 거슬리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를 열 받게 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 아닌지, 왜 그러는지, 생각하고 분석하느라 정신력을 많이 소모했었다. 그런데 감사일기 작성을 하면서 하루 동안 감사했던 일을 찾으려고 노력하다보니 이전에는 해독이라고 생각했던 일에서도 감사를 발견했다.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은 마음공부를 시켜주니 감사하고, 내 마음작용의 수준을 알게 해주어서 감사했다. 경계를 받아들이는 내 마음에 초점을 맞추는 게 중요한 것이었다.
넷째, 우리 공부는 결국 곳곳마다 일마다 은혜와 감사를 장만하고 퍼트리는 공부다. 내가 공부를 잘하고 있는지, 인생을 잘살고 있는지는 내가 하는 행동과 내가 하는 취사로부터 은혜와 감사가 생겨나고 있는지, 나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행복해지는지 불행해지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작게는 경계를 당해 어떻게 취사해야 하는지, 크게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아직까지는 취사가 100% 잘 되지는 않고, 화내고 나서 알아차리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한 번에 안 되면, 두 번 해보고, 두 번에 안 되면 세 번 해보면서 자꾸자꾸 하다보면 차차 나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엄마의 역할

글. 김수미

아이의 친구 엄마에게 사진을 받았다.
한 학원의 설명회 사진이었는데 그 사진 속에는 이런 글이 있었다.

요즘 엄마는?
1. 자녀의 보신을 위한 영양사 및 조리사
2. 자녀의 수면을 위한 운전기사
3. 입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정보 수집가
4. 과외 교습이나 학원 일정을 조율하는 매니저
5. 자녀가 학습에 집중하는지를 감시하는 감독자
6. 수험생 자녀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치어리더
7. 수험생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기도자

엄마는 이러한 역할을 한다고 쓰여 있었다. 나는 이러한 현실이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요즘 엄마는 ‘아이의 즐거움을 찾아주는 역할은 하나도 없고 공부 학습 위주의 역할만 하는 것인가? 아이의 하루하루는 아이의 자율성이 아닌 엄마의 계획 지도하에 이루어져야 하는 건가?’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저 내용처럼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소수에 불과하겠지만 그 소수가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러면서도 저 문장에 나를 대입해 보며 점수를 매기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어떤 부모인가? 내가 맞는 것인가?’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나는 부모가 옳은 생각을 하고 주변 말과 행동에 흔들리지 않아야 아이가 바르게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아이가 잘 나아갈 수 있도록 뒤에서 빛을 밝혀주고 길 안내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가진 나도 아이의 부모이기 때문에 학년이 올라갈수록 생각이 바뀌고 흔들릴까 걱정이 된다.
나는 어떤 엄마일까? 어떤 엄마가 될까? 걱정이 되긴 하지만 내가 가진 생각이 흔들리지 않도록 할 것이다. 오늘도 밝게 뛰어오는 아이를 보며 생각한다. ‘아이가 잘 성장할 수 있도록 길 안내자 역할을 하기 위해 내가 먼저 노력해야 되겠다.’고.
“아들, 엄마도 엄마 역할이 처음이라… 어렵고 미숙한 게 많아. 우리 같이 성장해 가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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