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글. 정인신

해가 가고 달이 가고 세월이 흘러갑니다. 겨울의 시작인 입동을 지나며 찬 서리에 빛바랜 꽃나무를 베어내고 낙엽을 쓸어 모아 태우면서 부질없었던 내 삶의 기억들도 흘려보냅니다.
텅 빈 들녘을 지나는 메마른 바람 소리가 들리고 대지는 긴 침묵에 잠기는군요. 열어두었던 창문을 닫고, 텃밭에서 자란 무를 뽑아 동치미를 담그고, 동동거렸던 발걸음을 멈추어 나와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침묵은 학교와 병원 같다.’고 어느 수행자는 말합니다. 그곳에 들어가면 배움과 치유가 일어난다는 거죠. 내면으로 들어가 깊은 통찰력을 얻고 나를 충전해야만 그 안에서 평화와 사랑과 행복을 채울 수 있다고 합니다.
침묵은 외부에서 오는 행복과 달리, 나를 부양시켜 주는 고요한 내면의 행복을 찾는 일이지요. 영적인 뿌리가 튼튼해지도록 때로 육근문을 닫고 내면으로의 여행을 시작해도 좋겠습니다. 몸 안의 기관들이 힘을 얻으려면 스스로 존재하는 법을 배우고 나의 가장 근본적인 성품을 확인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자리는 여여한데 만물은 쉼 없이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거울을 봤더니 그 얼굴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며 기도에 오신 할머니 교도님이 쓸쓸해 하십니다. 그 얼굴이 언제 적 얼굴일까요? 어쩌면 젊은 시절의 곱고 팽팽했던 그 모습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거울을 보다 문득 내 모습이 낯설어질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바로 내가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게 되지요. 우주가 춘하추동으로 변화하는 것처럼 사람은 누구라도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쳐야 하니까요.

사람의 모습이 변하는 것처럼 자연도 늘 변화합니다. 추운 겨울을 지나 봄이 오면 텅 빈 들판
은 온갖 생명들이 살아날 것이고 잎을 떨군 나무들도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 맑은 얼굴로 새 단장하고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겠죠.
그렇게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만남과 이별이 존재합니다. 초창기 교단을 지켜주셨던 스승님들께서 열반의 길을 떠나시고, 신심·공심 많은 교도님들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면 아쉬운 마음과 더불어 교단의 미래를 생각하게 됩니다. 나이 들며 조금은 더 철이 드나 봅니다.
햇살이 따사로운 날, 그분과의 이별은 가까이서 나누어야 될 것 같아 바쁜 걸음으로 영모묘원에 갔습니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길이 막혀 시간이 지체되는 동안 나는 영모원 뜰에 앉아 오래전 종로교당에서 함께 했던 일들을 생각했습니다.

법회며 기도며 교당의 대소사에 빠짐없이 참여하며 교도의 모범이 되신 분, 립스틱 곱게 바르고 하얀 치아를 다 드러내며 호탕하게 웃으시던 분, 그분과 함께하는 자리는 항상 유쾌했지요. 양말을 기워 신고 나눔장터에서 옷을 골라 입어도 멋지고 자유롭고 넉넉하셨던 분.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대도정법 만난 기쁨으로 50여 년 스승님께 신성을 바치고 한결같은 정성으로 공도사업에 헌신한 참주인, 결복기 대운을 열어가는 대 공덕주가 되시고 일원대도 힘써 굴리는 대도인으로 오시기를 축원합니다.’ 함께 모인 인연들은 합장하고 종법사님 법문을 올려드렸습니다.
향불을 올리고 영정을 바라보니 그분의 맑은 웃음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듯 했습니다. 투병 중에도 법회를 지키며 공부인답게 가겠다고 준비했다는군요. 일체의 연명치료를 사양하고 청정일념 챙기셨다니, 대호법다운 해탈도인의 모습은 다음 생을 위한 새로운 시작의 준비이셨네요. 다시 오시는 길도 그 길 따라 오시리라 믿어집니다.

공부인으로 살고 공부인답게 떠나는 것 참 아름다운 일이지 않나요?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인데 그 길을 알고 살아간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자신의 생각이 곧 자신의 운명임을 기억하라. 우주의 법칙은 자력과 같아서 어두운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어두운 생각이 몰려온다. 그러나 밝은 마음을 지니고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살면 밝은 기운이 밀려와 우리의 삶을 밝게 비친다.’ 법정 스님의 글입니다.

운명! 타고난 운명이 분명 있지만 미래의 삶은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지요. 내가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살아온 흔적과 삶의 흐름을 깨달아 목적지를 정하고 간다면 법위가 한 단계 한 단계 오를 때마다 인격의 향기가 묻어나겠지요. 나이 들수록 새로워지는 꿈! 세상을 바꾸는 시간입니다. 어느 덧 한 해를 보내는 12월, 새해 새로운 시작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저작권자 © 월간원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