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나 봄

그 다리 위에서 우리 만날까요!

취재. 노태형 편집인

한동안 사람의 발자국이 뜸했습니다.
겨울잠에 빠진 여울에는 산 그림자만 아침·저녁 강을 건넙니다. 두런두런 인기척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지만 올 듯 말듯 망설임이 그림자처럼 흩어집니다. 간혹 멀리 산골에서 숨 가쁘게 달려온 냇물이 하소연만 한가득 풀어놓고 떠나죠. “저기 높은 산 계곡에는 아직도 얼음 녹는 소리가 검은 밤을 타고 쩌렁쩌렁 울린다니까요.” 겨우내 많이 외로웠나 봅니다. 다들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침묵하니 말동무가 영 그리운 거죠.
아이 하나가 돌다리 위에 섰습니다.

주춤주춤 다리 가장자리에 멈춘 아이도 많이 외롭습니다. 등에 가득 햇살을 머금은 아이가 그림자를 풍덩 물속으로 던집니다. 오래 만에 강물도 장난기가 발동합니다. 아이의 그림자로 일렁일렁 노를 저어 물속을 맴맴 도는 것으로 시간을 흘려보내죠. 아이가 토해낸 하얀 입김이 아지랑이처럼 번져갑니다. 졸졸졸, 비로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군요. 봄이 오려나 봅니다.
세월의 강을 건너는 일은 참 지난합니다.

“그 강에 한번 풍덩 빠지면 헤어나지를 못한다니까요. 몸부림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게 세월의 강이죠. 그러니 그 강가에는 함부로 가지도 말아요.”
하지만 이 세월의 강을 거스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군가는 그리워서 아프고, 누군가는 더 가지지 못해서 배고프고, 누군가는 이루지 못한 꿈에 한이 되고, 또 누군가는 미운 마음이 넘쳐흘러 고통이 되고, 또 누군가는 그 세월에 꽁꽁 묶여 발버둥 치겠죠. 무수한 이야기가 강가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소설도 이 세월의 강 속에서는 한 편의 산문에 그칠 뿐입니다.

지나온 세월의 강을 돌아봅니다.
어느 산모퉁이를 굽이쳐 돌면서 진달래 피어나는 봄을 만났고, 또 어느 마을 어귀 개울 속에서는 질풍노도처럼 출렁이던 여름을 만났고, 그 어느 기억마저 희미한 개울가에서는 빨갛게 익어가는 가을을 지났으며, 한때는 꽁꽁 얼음 속에 갇혀 겨울을 지내야 했죠. 어디 그런 시절뿐이었을까요? 무수한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마주하면서 참 많이도 울고 웃으며 보낸 세월들입니다. 지나 보내고 나니 말이죠.

세월에 다리를 놓습니다.
그리운 사람을 만나 “늘 보고 싶었다.”는 말 한 마디 애틋하게 고백하려고요. 혹, 섭섭한 마음에 눈 마주치지 못한 사람 있었다면 “내가 잘못했다.”는 말 한 마디라도 전하려고요. 늘 받기만 하고 주지도 못한 채 흘려보낸 세월을 더듬으며 “참 고마웠다.”는 말 한 마디는 건네야죠.
돌다리 아래로 강물이 흘러가듯 멈추지 않는 세월을 막을 수야 있겠습니까. 그래서 수백 년 세월을 버텨온 돌다리 위에서 내 모습을 비춰봅니다. 참 많은 얼굴이 일렁입니다. 그 모든 얼굴들이 내가 살아온 세월인걸요. 너와 내가 만나는 일은 늘 그리움이었습니다.
아직은 시위하듯 꽃샘추위가 몇 차례 더 찾아오겠죠. 겨울은 쉬이 가지 않고 그래서 봄도 쉬이 오지 못합니다. 그럼 우리, 봄꽃과 눈꽃이 만나는 날, 그 다리 위에서 만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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