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도덕… 원불교는?

글. 박정원  월간<산>  편집장·전 조선일보 기자

원불교 경전을 두고 일부 사람들은 “무슨 도덕교과서 같다.”고 말한다. 사실 유심히, 꼼꼼히 보면 그런 측면도 없지는 않다. 원불교는 유달리 도덕성을 강조하는 것 같다. 종교의 이적(異蹟)성과 신비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종교와 도덕성은 어떤 관계이고, 어떤 게 우선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의 종교는 사람을 모으기 위해 이적성과 신비성을 발휘하고, 그것의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순 없지만 그 이적성과 신비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거나 따르게 했던 적이 있다. 이런 점에서 종교는 도덕과 별로 상관이 없을 것 같다. 과연 종교는 도덕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부분으로 존재할까, 아니면 종교와 도덕은 완전 별개일까, 그렇지 않다면 종교와 도덕이 완벽히 일치할까.

종교(宗敎)를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사람들이 근원적으로 받들어 모시는 가르침이다. 숭배의 대상은 결코 인간과 동격이 아니다. 종교, 그 자체는 신격이다. 원시사회에서 종교는 실천적이고 윤리적 요소를 거의 갖고 있지 않다. 종교와 도덕이 완전 별개로 독립적으로 작용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애니미즘으로 대표되는 시절의 종교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현대사회에도 없는 건 아니다. 신(神)과의 합일이나 영원한 구원이나 열반에 대한 탐구로 삶을 지배하는 종교집단은 인간의 도덕에는 관심이 없다. 또한 그들 삶의 기준도 안 된다. 완전 순수한 종교주의자이거나 광신도도 그중의 한 부류가 될 것 같다. 
대체적으로 알려진 종교는 종교의 일부로서 도덕성을 강조한다. 종교는 인간과 초자연적인 실재와의 관계를 말하고, 도덕성은 인간의 행위와 인간관계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종교는 ‘종교를 가진 인간이라면 사회생활을 잘 하고, 인간관계를 잘 맺어 공동체에서 모범적인 삶을 영위하라.’고 가르친다. 그게 종교의 도덕성의 한 부분이다. 도덕성 외의 부분은 인간이 범접하지 못하는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계명이나 규율은 종교가 가진 도덕성의 일부를 의미한다. 이는 올바른 삶에 대한 지침이자 도덕적 명령이다. 이슬람에서도 도덕적 가르침은 참된 신자가 알라의 인정을 받고 낙원의 보상을 얻기 위해 따라야 하는 실천적 규범의 중심이라고 한다. 힌두교에서도 보다 나은 환생을 위해서 현세의 주어진 신분에서 업(業)을 잘 쌓아야 하며, 이를 가르치는 카르마 교리도 인간이 세상에서 지켜야 할 참된 도덕적 생활의 의무를 나타낸다. 불교도 도덕적 행위는 자신의 미래를 결정짓는 수단이며, 도덕성을 통해 자신의 공적을 쌓는다고 가르친다.

이와 같이 전통적인 세계종교에서 보이는 형태는 도덕성이 종교의 중요한 한 부분이라는 점이다. 결코 본질은 아니고 한 부분이고 종속되어 있을 뿐이라고 강조한다.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관계이고, 구원의 기본 전제는 인간의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무슬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신에 대한 믿음이며, 모든 도덕적 의무는 그 믿음에서 유래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힌두교에서도 이 세상에서의 옳은 삶에 미치는 결정적 영향은 모든 행동이 자신의 환생에 영향을 미친다는 카르마(Karma: 業)교리에 대한 믿음이다. 불교에서는 도덕적 삶을 통해 존재의 의미에 대한 본질과 덧없는 허상에 집착하는 자기중심적 욕망에 대한 깨달음으로 인도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처럼 종교와 도덕성은 원시사회부터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직·간접적으로 관련성을 가져왔다. 그렇다면 원불교는 도덕성과의 관계가 수평적일까, 아니면 수직적일까? 교전을 한 번 살펴보자. <대종경> 제3 수행품에서 소태산 대종사는 “정법 회상에서 신통을 귀하게 알지 않는 것은 신통이 세상을 제도하는 데에 실다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폐해가 되는 까닭이니, 어찌하여 그런가 하면 신통을 원하는 사람은 대개 세속을 피하여 산중에 들며 인도를 떠나 허무에 집착하여 주문이나 진언(眞言) 등으로 일생을 보내는 것이 예사이니, 만일 온 세상이 다 이것을 숭상한다면 사농공상이 무너질 것이요, 인륜강기(人倫綱紀)가 묵어질 것이며, 또는 그들이 도덕의 근원을 알지 못하고 차서 없는 생각과 옳지 못한 욕심으로 남다른 재주를 바라고 있으니, 한 때 허령으로 혹 무슨 이적(異蹟)이 나타난다면 그것을 악용하여 세상을 속이고 사람을 해롭게 할 것이라.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신통은 말변(末邊)의 일이라.’ 하였고, ‘도덕의 근거가 없이 나타나는 신통은 다못(다만의 방언) 일종의 마술이라.’고 하였나니라.

그러나 사람이 정도를 잘 수행하여 욕심이 담박하고 행실이 깨끗하면 자성의 광명을 따라 혹 불가사의한 자취가 나타나는 수도 있으나 이것은 구하지 아니하되 자연히 얻어지는 것이라, 어찌 삿된 생각을 가진 중생의 견지로 이를 추측할 수 있으리요.”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도덕으로 잘 무장해서 수행하면 혹 이적과 신통이 나타날 수 있으나, 구하려고 하면 패가망신한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원불교의 가르침도 ‘흠 잡을 데 없는 도덕적 인간’을 곧 ‘성인’이라고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무신론과 무종교인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허무성도 그만큼 비례한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명상을 찾는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종교적으로 해석하자면 21세기 초현대사회는 대체종교 혹은 실리종교가 대세를 이루고 있지 않나 판단된다. 그 대체종교가 바로 도덕성으로 무장된 명상을 하는 사람들이다. 원불교 교리와 가르침과 매우 유사성을 띤다. 그런데 아직 원불교 교세는 미약하다. 아직 변화에 대한 티핑포인트가 부족해서일까,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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