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말통신 보내는 날

어쩌다 말일에 즈음하면 ‘어서 소식 주세요.’ 하는 문자들이 오고,
‘왜 오늘은 소식이 없나요.’ 하는 문의도 들어온다.

글. 고영봉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 금형을 제작하는 회사의 기능공으로 맹활약 중이던 나는 어느 날 휴식시간 동료들과 공장 담벼락에 주저앉아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세상 잡다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그중 동갑내기로 영업부에 근무하던 친구가 매우 기품 있고 지성 있는 모습으로 한 손엔 서류 가방을 들고 반듯한 자세로 커피를 마시는 모습이 얼마나 괜찮아 보이던지, 그날 이후 나의 목표는 ‘깔끔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영업사원이 되는 것’이었다.
다음 해에 이직을 통해 그토록 꿈꾸던 세일즈맨의 길에 입문할 수 있었으니, 영업사원의 발단은 순전히 왠지 깔끔한 태가 나보이는 외모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천진스러운 생각으로, 당초 기대완 달리 세상 할 것 못 되는 게 세일즈였다. 처음엔 기품과 지성은 커녕 날마다 깔끔한 외모를 유지하는 것도 부담과 속박으로 변환되어 ‘괜히 이직했구나.’ 하는 후회를 하는 데 채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세일즈의 특성상 두 달만 얼굴을 안 보면 잊히는 게 정석이었다. 초년시절이야 얼마 안 되는 인연들을 관리할 수 있었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증가하는 고객의 숫자를 일일이 챙기기가 어려워졌다. 더욱이 업의 특성상 전국 방방곡곡을 무대로 활동해야 하는 일이다 보니 그들에게서 나의 이미지가 잊히지 않도록 하는 특별한 대책이 절실히 필요했다.
체질상 운동을 싫어하기도 하거니와 음주가무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택한 고객관리 방법은 가지고 있는 작은 재주, 즉 메일을 통해 짧은 글을 써서 보내는 것이었다. 평소 몇 분 교무님께 적어 보낸 글을 고객들에게도 보내면 도움이 되겠다는 조언을 듣고서 살짝 해 본 시도는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처음 20명에게 보내기 시작했던 글 한편이 이제는 천명에 육박하여 ‘월말통신’ 이라는 타이틀로 매월 말일에 행해지는 기념행사가 되었다.
때로는 서정이 듬뿍 묻어나는 글을, 어떤 달은 그들도 함께 겪는 녹록지 않은 삶의 이야기를 담백하게 적어 보내는 월말통신은 다른 어떤 고객관리보다도 좋은 반응을 받게 되었다. 이제는 매월 말일이면 직원들과 함께 한 달의 감회를 나누는 의식을 15년째 이어오고 있다. 나와 인연된 고객들은 물론 교도님들과 친구들까지 다양한 팬이 확보되어 글쓰기가 취미인 나에게 많은 힘이 되어주고 있다
어쩌다 말일에 즈음하면 ‘어서 소식 주세요.’ 하는 문자들이 오고, 가끔 하루 이틀 지나서 메일을 보내게 될 땐 ‘왜 오늘은 소식이 없나요.’ 하는 문의도 들어온다. 몇 번은 내가 보낸 글이 돌고 돌아 나에게 다시 온 적도 있다. 그중 문학에 뜻이 맞는 분들을 통해서 가끔씩 원고요청도 받는다. 알게 모르게 나의 글이 사람들의 휴식에 잠깐이라도 도움이 된다는 뜻인 것 같아 기분이 좋다.
그런 연고로 나에게 매월 말일은 생업을 영위하고 나의 취미도 개발하며, 만나는 인연들에게 회사도 소개하고 나를 홍보하는 나만의 기념일이 되었다. 이 얼마나 소소하지만 멋진 일인가.


신지 못한 신발

나와 같은 날 태어난 당신을, 아주 많이 사랑한다.

글. 김지현

나는 한 해를 맞이하면 새 다이어리를 사는 습관이 있다.
열두 달로 나뉜 한 해의 숫자들을 책상 위에 펼쳐 놓은 후 가장 먼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태어난 날을 노란색 색연필로 표시해둔다. 새해를 시작하는 나름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다. 그러다 문득, 오월의 어느 날에 시선을 멈춘다. 다른 칸과 마찬가지로 노랗게 색칠된 그곳은, 두 개의 기념일이 나란히 적혀있다. 나와 엄마의 생일이다.
나는 엄마와 생일이 같다. 28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엄마와 내가 같은 날에 태어났다고 생각하면, 이상하게 마음이 찌릿하다. 처음부터 그러한 감정을 가졌던 건 아니다. 내가 지금보다 좀 더 어렸을 때, 나는 그것이 참으로 싫었다. 엄마와 나의 생일은 하나의 생일 케이크로 치러졌다. 고작 열둘인 내게 기다란 네 개의 초로 이뤄진 생일 케이크는 온전히 나만의 것이 아닌 것 같아 서러웠다. 생일 노래 앞에서도 나는 뒷순위였다. ‘사랑하는 엄마의’가 먼저 나온 후, 나의 이름이 나왔다. 나는 온전히 그런 쌀알만한 작은 이유로 엄마와 함께 맞이하는 생일이 싫었다.
그렇게 시간이 좀 더 흘러 내가 스물을 막 넘겼을 무렵, 우리 집은 이사를 하게 됐다. 이삿짐센터에서 내려주는 짐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는 건 꽤 고단한 일이었다. 나는 파란색 이사 상자에 담겨있는 손때 묻은 물건들을 이곳저곳에 정리하다가, 어디에 두어야 할지 알 수 없는 물건 하나를 보게 되었다. 아주 오래전에 산 듯, 유행이 한참이나 지나버린 아이 신발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이 신발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의 시간을 기억한다. 파란색 이사 상자 속에서 신발을 꺼내 들고, “이게 뭐야?”라던 내 물음에 당혹해하다가 설핏 슬픈 얼굴이 되어버린 엄마의 얼굴을 기억한다. 엄마는 한참 후에야 당혹해하던 표정을 지우더니,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그 신발이 내 신발이라고 말했다. 나는 왼손에 신발을 들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이게?”라고 물었는데, 엄마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후에야 알게 되었다. 엄마는 오래전 나의 생일날, 그 신발을 사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전해주지는 못했다. 내 어린 시절 우리 집은 겨우 생활하는 수준이었는데, 엄마는 그 형편에 산 신발이 아까워서 내게 주기가 어려웠다고 했다. 그 당시의 내 발사이즈보다 이미 큰 신발을 사두고도, 오랫동안 신기려는 마음에 장롱 속에 두었다고. 그러다 어느새 내가 훌쩍 커버렸고, 그 신발을 더는 신을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다이어리를 넘기다가, 오월의 어느 날을 바라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찌릿하다. 28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나와 같은 날 태어난 나의 엄마가, 그날 장롱 속에 둔 그 신발을 생각하면 마음 아래 매달린 커다란 추가 큰 진폭으로 흔들리는 것 같다.
그리고 말하고 싶다. 내가 28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나와 같은 날 태어난 당신을, 아주 많이 사랑한다고.


포기할 준비

그래서 나는 근 15년 만에 다시 외국어 공부를 위해
회사를 나왔고, 유학을 떠난다.

글. 김수란

포기. 포기라는 단어는 절대로 성공의 반대말이 아니다. 한 발 더 나아가기 위한 과감한 선택일 뿐….
서른 중반, 많이 살지도 그렇다고 어린 나이도 아닌 애매한 나이. 하지만 어린 나이에 나는 꿈이 매우 많았다. 미스코리아, 간호사, 의사, 명창, 선생님, 웃음치료사…. 뭐든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질 거라고 믿었지만, 당시의 나는 어른들이 정해준대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착한 아이에 더 가까웠다.
그러다 천천히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될 즈음, 아버지는 내게 ‘유학’이라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말을 하셨다. 10년 후에는 중국이 번성할 것이니 중국어를 배우라고. 당시의 나는 판소리를 하려고 마음먹은 후여서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1남 2녀를 키우는 우리집이 여유 있는 삶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줄기 희망이 있길 바라며 그 끈을 잡았다.
그렇지만 IMF로 인해 중도에 다시 한국으로 들어와야 했다. 고등학교 졸업은 검정고시로 대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4년제 대학 중문과에 특채로 합격하였으나, 나는 다시 한 번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됐다.
영어를 잘하지 않았기에 중문과를 나와 뭘 해야 할지 고민을 하던 나는 좋은 기회를 포기하고 전문대학에 진학했다. 좋은 학점을 위해 열심히 공부했고, 좋은 회사에 들어가려고 자격증을 준비하고, 사회생활도 열심히 했다. 정말 열심히 살았다. 혼자의 힘으로 결혼자금도 준비했고, 대출이 있긴해도 조그마한 집도 내 명의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세상에 맞춰 살아가다 보니 내 꿈이 무엇이었는지는 잃어버렸다.
그러다 문득 나의 5년 후, 나의 10년 후를 그려보았다.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엄마가 되고, 아내가 되고… 그러다 보면 회사를 꾸준히 못 다니겠다 싶어 다시 한 번 미래 설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높은 연봉, 지금까지의 경력, 투자한 시간을 포기 할 수 있을지. 덜컥 두려움이 내 앞을 막아섰다.
서른두 살 여성이, 경력도 없는 곳에서 이직하기란 사막에서 바늘 찾기보다 어려울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의 미래를 위해서 어떤 게 나은 선택일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직 도전해도 괜찮은 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근 15년 만에 다시 외국어 공부를 위해 회사를 나왔고, 유학을 떠난다.
당연히 주위의 어른들은 말한다. 왜 무모한 짓을 하느냐고. 하지만 어떤 이들은 말한다. 너의 새로운 도전을 응원한다고, 멋있다고…. 결코 나의 포기에 두려움이 없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포기를 선택할 것 같다. 더 나은 나를 위하여, 더 멋있는 나를 위하여….
현재는 번역일을 하고 있지만 이 또한 쉽지 않다. 쉬웠다면 포기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아직은 젊기에, 아직은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나이기에. 포기할 준비, 그 또한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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