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삼밭재 기도

- 독경 문서 연마 2 -

글. 이정재

처화가 11세부터 16세까지 5년간의 산신기도가 아무 소용이 없다며 내려온 그곳에, 4년 후 다시 오른 이유는 산신기도를 또 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삼밭재를 <원불교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여 마치 기도가 이어진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영산성지 구수산 삼밭재 초마골에 연한 넓은 바위. 이 바위에서 소태산 대종사가 11세 경부터 5년간 산신을 만나기 위한 기도를 올렸다. 이 바위 아래 샘이 있고 옛 절터가 있었는데 소태산이 부친상 전후하여 이곳에서 초막을 짓고 구도했다…….’

처음 5년간의 산신기도는 시기와 목적이 분명히 적시되었으나 두 번째는 그렇지 않다. 단순히 구도를 했다는 정도의 언급만이 있을 뿐이다. 이 설명은 이렇게 해석도 된다. 즉 ‘아무런 동기나 목적도 없이 또 다른 양식의 기도를 했다.’고. 그러나 처화의 구도역정기를 돌아보면 아무런 계획이나 동기가 없이 어떤 수행을 하지는 않았다. 나름의 계획과 단계와 곡절이 어우러져 있었고 절묘한 단계적 극복이 병행되었던 것이다.

1차와 2차의 삼밭재 기도는 내용과 규모 등에서 많은 차이를 갖는다. 둘의 차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이 있었듯이 2차 때는 1차와 달리 독경 문서 공부에 매달렸을 시기다. 1차 때의 기도에 이어 어떤 독공을 드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1차 때 그랬듯이 단독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임하지 않았던 점이 이를 암시한다.

2차 때의 초당 건립은 외삼촌이 담당했다. 이는 집안에서 일정한 지원과 찬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처화의 수동적 자세와 달리 가족에 의해 추진된 2차 삼밭재의 기도터 건립은 야심 찬 계획의 일환으로, 모친도 적극적으로 나선 양상이었다. 그것은 남편의 뜻에 따른 처사이기도 했겠지만 내심 아들의 안정을 간절히 바랐던 이유이기도 했다. 부친이 직접 초당을 건립할 수도 있었겠으나 이는 나이도 있고 또 모양새가 좋지 아니했다. 독경 일을 하는 ‘처사의  직’은 그때도 역시 환영받을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처사 만들기’의 계획은 부친이 주도하였으나, 홀로 결정한 일은 아니었다. 당시의 민속지식으로 볼 때도 그렇지만, 가족은 물론 주변의 지인들과 충분한 논의를 거친 후 내려진 대안이었다. 민속지식상 한 사람이 넋을 잃고 아무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아프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방황을 한다거나, 현실적 의욕을 전혀 보이지 않는 부류는 일종의 신들림 현상으로 간주되어 치료에 들어간다. 가벼운 귀신은 이를 쫓아냄으로 해결을 보지만, 중증인 경우는 그 신을 영접해야 한다는 처방이 내려지고, 내림을 받은 이후 그는 ‘민간의 사제’가 되어야 했다. 처화의 행적을 보거나 상황을 볼 때 부친은 처사를 초빙하여 내림굿을 할 수 밖에 없었고, 당시로서는 이건 당연한 상식이었다. 처화가 당시 보여줬던 행적은 전형적인 신병의 징후였고, 당시의 민간지식으로는 그 이상의 진단을 내리기 어려웠던 것이다.

부친의 고민은 매우 깊었을 것이다. 밖으로 드러내어 자랑할 일도 아니고, 스스로 나서서 기도처를 지을 만큼 자랑스런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 일은 앞서 언급했듯이 모친이 담당하였다. 처화 자신이 결코 바랐던 바도 아니기 때문에 산신기도와 달리 적극성을 보일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길룡리에서도 소문은 자자했을 것이고, 어려서부터 기도하고 다니더니 결국 처사가 되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을 것이다. 

부친이 결정을 하고 추진은 하였으나 이는 최선이라기보다는 차선책이었다. 그럼에도 부친은 내심 ‘이 일도 잘만하면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실지로 이런 일은 당시나 지금이나 잘만 불리면 큰 인물이 될 수도 있고 큰 재물도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들의 역량을 돌아볼 때 충분히 그럴만한 재능이 있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아들의 성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는 게 한이다.’라고 한 최후 일성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그에게는 대각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것은 오늘의 입장에서 본 결과론적 해석이다.

부친이 바랐던 ‘아들의 성공’을 혹시 다른 관점에서도 접근할 수 있다. 참동학에서 진행되던 ‘교단을 꾸리는 일’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일제하에서 오히려 부친이 걱정하던 바였고, 당시 교단의 분위기나 정황상 불가능했다. 교단설립은 여러모로 볼 때 불가했다. 강증산의 소천 직후일뿐더러 그러기에는 처화의 나이가 너무 어렸다. 처화 왈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는 이 강증산의 소천을 두고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추정이 가능하다. 후천개벽 실현의 한 축이 사라졌으니 어디서 어떻게 뜻을 이룰 것인가. ‘어찌할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부친은 동학의 참혹함을 경험한 세대다. 그 연장선에 있는 참동학에서 성공을 기대한다는 것은 더욱이 어려울뿐더러 살벌한 일제강점기 위험천만한 일이기만 했다. 그런 기대는 애초에 할 수가 없던 상황이었다. 아들이 그런 곳에 발을 내딛고 있다는 점을 알아챘을 때 부친은 더욱 초조해졌다. 아예 그 발길의 싹을 잘라내야 했던 것이다. 처사일화는 그런 절박함이 깃들어 있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수년 후 소태산은 이를 실현시켰다. 소태산 대각 후 천제를 지내고 통령이 인정되어 교단 창설이라는 과도기 과정을 치렀기 때문이다. 이는 반대로 그리고 부친의 뜻과 다르게, 그러니까 아이러니하게도 부친이 바라지 않던 방향으로 결정이 난 결과다. 이 결과를 볼 때 부친이 염려했던 바가 사실이었음이 방증된다. 아울러 당시 처화의 관심은 온통 참동학의 실현에 있었음도 알 수 있는 바다. 증산의 뒤를 이어 진정한 후천개벽의 주제자가 되기를 희망했던 증표이기도 하다.

처화가 기도처에서 독경 연마를 한 점은 그도 부친의 의도에 어느 정도 수긍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연마의 시간은 길어야 몇 달 정도가 아니었을까 추정했다. 그랬던 그가 돌변한 것이 어떤 연유에서인지 정확히 알 길이 없으나 두 가지의 관점에서 나눠 볼 수 있다. 하나는 독경 연마라는 순수한 공부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현장에서 해야 하는 직능수행의 일이다.

독경집은 다양한 유불선의 경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내용은 처화가 무엇보다도 좋아했을 것들이다. <옥추경>이 그 중 하나였던 점을 볼 때도 알 수 있다. 독경 수행은 일천정성을 들여 온 정신을 집중하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 그 정성의 덕으로 효험을 보는 것이 독경의 일이 아닌가. 일심을 기르고 양성하는 일은 처화도 익히 원하는 바였다. 처화에게 주어진 이런 공부는 새로운 세계를 여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즉 전통사상과 문화에 대한 지평에 관한 것이다. 그는 이미 당시 훔치교(증산교)의 도꾼을 만나고 다니면서 독경과 주문 수행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는 정신을 집중하고 하늘과 통령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전통의 한 응용이었다. 이것들이 둘이 아님을 처화는 알게 된다.

그런데 도꾼들이 행했던 방식은 이와 다른 것이었다. 여기서 그는 새로운 방식의 주문수행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그가 강증산의 제자들과 김제 통사동 영모제에서 주문수행을 했던 적이 있다는 <도전>의 기록을 무시할 수만은 없다(<도전> 11:36(증산도 도전편찬위원회, 2005, 대원출판사)). 전통적 처사직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처화는 다시 주문수행에의 동참이란 영감을 얻게 되고 수행의 길로 들어설 힘을 얻게 된 것이다. 가출의 동기가 여기서도 확인이 되어야 한다. 처화가 행한 주문수행은 독경수행에서 출발하여 가출 후 흙구덩이 등의 수행, 노루목 주막 수행, 영모제 수행, 연화봉 수행 등으로 이어진다.

돌이켜 보면 민간전승과 민속문화는 처화를 대각으로 이끄는 견인차와 촉매의 역할을 하였다. 산신 만나기 삼밭재 기도는 물론이고 고소설의 영향으로 인한 도사구하기의 구도 역시 같은 맥락이다. 처사일화를 촉매로 한 처사직, 독경집 수행, 가출과 주문수련 등 또한 전통문화와의 상관성 속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특히 처사일화와 독경 연마는 이후 회상 건설과 제법의 과정에도 심도 있는 작용을 하였다. 구사와 득도의 과정에 관여한 전통적인 민속문화를 결코 가벼이 볼 요소가 아니다. 보다 면밀한 관심과 연구가 이어져야 할 것이다. Ι교수·경희대학교 민속학연구소장. hogo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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