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의 시대’가 원불교와 맞다?

초기 불교와 닮아…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은 미래종교 모습

글. 박정원  월간<산>  편집장·전 조선일보 기자

현대는 우상파괴나 무상(無相)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영웅을 탄생시키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만들어진 영웅도 거부하는 시대다.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명상 붐이 이를 대변하고 있지 않나 싶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인구와 성직자의 급감으로 연결된다. 모든 종교의 인구가 줄고 있다. 변하는 세상의 한 단면이자 특징이다. 성주괴공과 불생불멸·생주이멸(生住異滅) 순환과정의 이치로 보인다.

우상은 사실 기독교, 즉 서구문명의 본질이다. ‘나 외의 다른 신을 믿지 말며’가 우상의 극치를 잘 보여준다. 동양의 문화나 종교와는 좀 다르다. 부처는 초기에 “나를 믿지 말고 스스로 깨달아라.”고 했다. 자성(自性)을 찾는 구도과정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누구나 불심을 가지고 있으며, 자성을 깨닫는 순간이 도(道)를 깨치는 바로 그 순간이다.
그런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이 인도를 점령하면서 동양에 서구문화를 융화시킨다. 그게 그리스문화와 오리엔트문화를 융합시킨 헬레니즘문화다. 동양의 우상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그 시기가 기원전 330년 전후 즈음. 기독교도 초기엔 일신숭배의 우상화로 자연신, 즉 다신(多神)에 익숙해 있던 그리스와 그 주변 유럽지역의 포교에 상당히 애를 먹는다. 우상이라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이를 부단히 극복하고 정복해 간다. 이것이 바로 서구 기독교 정착과정이다.

초기 불교의 무불상시대는 약 500년 간 지속된다. 중생과 구별되는 부처의 모습을 함부로 표현하는 건 신성모독이라고 여겼다. 불상 대신에 탑(부처의 유물과 유물을 보관한 탑: stupa)이나 보리수, 법륜 등 부처와 인연이 깊은 유물을 예배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다 마케도니아가 인도를 정복하면서부터 우상의 영향을 받는다. 이미 마케도니아는 우상숭배가 시작된 상태였기 때문에 인도에서도 불상을 더 이상 신성모독으로 여기지 않게 됐다. 특히 지금 파키스탄 북부지역은 당시 오랫동안 그리스문화의 영향권 하에 있었다. 자연스럽게 우상, 즉 불상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초기 불상들이 동양인이 아니라 서구인 비슷한 형상을 한 이유는 그리스의 아폴로신과 같이 부처를 본떠서 불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불상을 우상의 대상으로, 즉 관불과 예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관념적 대상의 현실적 형상화가 주요 이유였다. 그 불상이 여러 세기와 여러 지역을 거치면서 나라마다 다양한 형태로 형상화됐다. 초기 그리스인 비슷하게 제작된 불상는 점차 나아가 그 나라 민족의 모습과 비슷한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따라서 불상의 역사는 2,000년 남짓 된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원불교는 왜 우상의 대상이 없을까에 대한 화두를 한 번 가져본다. 우상이 과연 이 시대의 트렌드에 맞을까부터 시작해서 무상의 시대에 원불교가 정말 미래종교 아닌가 하는 생각에까지 이른다.

지금 세상은 관념적 대상의 우상은 파괴되고 스스로 자기 모습, 즉 자아를 되찾는 시대라고 서두에 언급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고 자연과 우주는 무한한 존재라고 인간은 인식하기 때문에 절대자에게 의존하는 속성이 강하게 있다. 우상숭배의 대상으로서 변천역사를 살펴보면 미래는 분명 신에 대한 형태의 변화를 짐작할 수 있다. 선사시대는 자연신으로서 다신을 숭배했다. 토테미즘과 샤머니즘이 횡행하던 시대였다. 그러다 단일신으로 바뀐다. 동양은 지배층은 단일신으로, 피지배층은 다신으로 혼재하는 과정을 겪는다. 성주괴공·생주이멸의 순환과정을 겪는 이치에 따라 숭배대상도 자연스럽게 바뀌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숭배대상은 무엇일까? 지금 변하는 트렌드로 볼 때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병행하는 실천적 종교로서의 원불교 가르침이 미래종교의 형태에 가장 근접하지 않을까 싶다. 종교도 변하기 마련이다. 순환되는 이치와도 연결된다. 절대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현상과 물질이 갔다가 오고, 왔다가 간다.

종교의 관념성은 지극히 주관적 판단을 객관적 사실로 오인하여 확신을 가지는 데서 비롯된다. 종교는 관념적일 수밖에 없다. 추상적 가치나 관념을 현실화시켜 믿어나가는 과정이 종교다. 그런데 원불교는 진리적 종교의 신앙이라고 했다. 진리가 무엇인가? 바로 자성이다. 그 자성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즉 처처불상·사사불공과 연결된다. 자성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으라고 했다. 그게 진리라고 한다. 또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병행하라고 가르친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고 도덕적 훈련을 쌓아서 살으라고 한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에게 잘하고 잘 모시고, 자신은 도덕적으로 훈련해서 지내라는 가르침이다. 기존의 우상이나 숭배대상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고 방식도 판이하다.
관념 속의 종교가 탈각하고 나온 새로운 형태가 원불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 탈각은 명상이고 자성이고 자아다. 전형적인 미래 종교의 형태다.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의 본뜻을 잘 이해하고 실천해 간다면 본인도 득도하고 원불교도 자연스럽게 세상에 그 존재를 널리 알릴 것 같다. 관념이 우상을 만들어 수천 년 세월을 끌어온 지금, 우상이 없는 무상의 시대에 원불교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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