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쁜 데도 미운 데도 없으니
원만하다. 미스 불법연구회다.”

이리 불법연구회 나들이에는 세 사람이 동행했다. 조송광과 그의 의붓딸 양순이와 셋째 딸 옥순(조전권)이었다.
세 부녀가 불법연구회 본관에 간 날짜는 정묘년 구월 스무닷샛날, 양력으로 1927년 10월 20일 목요일이었다. 조송광이 이날을 잡아 본관에 간 것은 뜻이 있어서였다. 다음날 구월 스무엿세날, 불법연구회 4기념법 중의 셋째 기념일인 ‘전무출신 선대 제사 기념일’에 참예하기 위해서였다. (중략)
1927년 11월 29일부터 이듬해 3월 27일까지 석달 동안 정묘 동선에 참예한 선객은 남녀 합 40여 명이었다. 조전권은 선 공부에 그렇게 열심일 수가 없었다. 여학교를 다닌 사람으로서 노란책 가위(불법연구회 규약)에 있는 ‘취지 규약’을 외우기는 좀 유치함 감이 있었지만 그녀는 외우고 또 외웠다.
아버지가 보다 못하여 한 마디 했다. “너, 뭐 그렇게 자꾸 봐 샀냐. 뜻이 그렇구나 하고 한번 보면 되지. 보지 마라. 다른 거 봐라.” 총재 선생은 오히려 전권의 이 순진한 정성에 대해 칭찬을 했다. “나중에 전권이가 저거 아버지보다 나을 게다.” 아닌 게 아니라 후에 정묘 동선 성적 발표를 보니 딸은 갑(甲)을 받고 아버지는 병(丙)을 받았다.
석달 동선을 나면서 조전권은 출가 전무출신할 뜻이 확고하여졌다. 소태산 총재는 “니가 두 가지 문열이다.”라며 “여자 전무출신 문열이요, 정녀계의 문열이가 될 테니 모든 행동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당부하였다.
막상 정묘 동선 해제식을 미치고 나자 전권은 앞길이 막막했다. 당장 먹고 살길을 걱정해야 했다. “널 보내서야 쓰겠느냐. 널 여기 두자니 먹을 것이 없고 그러니까 공업부라는 것을 하나 꾸미자.” 농업부는 만석리에 가 농사를 짓는 팔산을 중심으로 한 부서였으므로 임시 부서를 하나 만들어야 했다. 그것이 본관에서 밭일하고 누에 치고 박 농사를 하게 되는 농공부였다. 임원들은 거의 정묘 동선을 난 신입 회원들로 구성되었다. 전권은 이들의 식생활과 세탁을 맡기로 하였다. 총재는 말하였다. “이제부터는 네가 벌어서 네가 먹어야 한다.”
자력 양성을 강조하면서 부인 선원을 달아내서 증축 공사(현 구조실 자리)를 하고 있는 앞 밭을 가리키며 “저 밭을 너가 책임지라.”고 하였다. 전권은 집으로 돌려 보낼까 두려워 얼른 대답을 하였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예수교 장로의 딸, 기전 여학교에 다녔던 꿈 많은 소녀 조전권은 만18세 나이에 농사 짓는 홀아비 총각들 불법연구회 일꾼(전무출신)이 사는 농공부의 부엌데기 노릇을 하였다. 점잖은 말로 농공부 공양원이라 하였다.
조전권은 선 나러 올 때 옷 몇 벌만 가져 나와 선을 났는데 해제가 되자 아주 출가 전무출신하여 부엌에서 남루한 옷을 입고 일했다. 하루는 총재가 농공부 오두막집에 와 부엌을 들여다 보았다. 전권은 밥을 먹다 깜짝 놀라 일어섰다. “괜찮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먹어라. 네가 큰 역사를 만든다.” 이 말에 힘을 얻어 전권은 농공부 소임에 재미가 붙었다. 불법연구회 먼지라도 좋게 보였다. 시든 이파리 썩은 나무도 다 기기묘묘하게 보였다. 다 큰 처녀가 괭이 들고 보리짚 모자를 썼지만 자랑스러웠다.
총재 선생은 종종 격려의 말을 하였다. “발 들여 놨다 내놨다 하지 마라. 아주 들여 놔라. 한 번 둘린다 하고.” 어떤 때는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전권이는 눈 귀 코가 이쁜 데도 미운 데도 없으니 원만하다. 미스 불법연구회다.” 총재의 이런 말씀이 조전권에게는 더 없는 큰 힘이 되었다.
시창 13년(1928) 5월 15일에는 제1회 기념 총회가 신축 대강당에서 열렸다. 이날 정기 총회에서 조송광은 제2대 불법연구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총회 다음날(5월 17일)에는 제1회 12년대 창립 유공인 기념 촬영을 하였다. 이때 맨 끝으로, 당시 새로 조직된 농업부원 이동안, 정일성, 박대완, 구남수, 송봉환, 박노신, 전종환, 이보국, 권대호, 김광선, 이호춘, 조전권 이상 12인이 각기 보리짚 모자를 하나씩 쓰고 신축강당 앞 양파밭에서 새 옷을 입은 채로 일하는 포즈를 취하고 촬영을 하였다.(사진 참고) 큰애기가 보리짚 모자 쓰고 호미 들고 사진 찍기를 수줍어하자, 총재 선생이 말하였다. “전권아, 네가 지금은 보리짚 모자 쓰고 호미 들고 밭을 매지만 앞으로 니 뒤에는 수천수녀들이 나올 것이니 니 사진을 박아 놔라. 후배들이 니 사진 한번 보자 할 때가 있을 것이다.” (중략)
농업부 공양원 석 달 만에 조전권은 소태산 총재를 배행하고 경성행 열차를 탄다. 조전권은 익산 농공부 공양주에서 경성 창신동 공양주로 전직이 되었다. 농공부에 비해 끼니 걱정은 덜하였지만 여기서 4년간의 고생은 더하였다. 한 번씩 총재 선생이 상경하면 이공주가 주로 모시고 법설을 들었다. 부엌 동자 주제라 전권은 어찌하면 제대로 법설을 한번 들을 것인가 생각뿐이었다. 장작불을 때다가도 선생님 좋은 말씀 있다 싶으면 장작불을 아궁이 밖에 끄집어 내놓고 귀동냥을 하였고, 설거지를 하다가도 좋은 말씀이 있다 하면 행주를 든 채 방밖에서 귀를 기울이곤 했다. 들어가 같이 들을 주제도 못되었지만 밥이 탈 것도 걱정이요, 옷에서 냄새가 날 테니 그도 염치없는 노릇이었다. 단지 귀동냥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남들은 따뜻한 방에서 공부할 때 전권은 얼음을 깨고 빨래를 하였다.

공타원 조전권 종사는 …
● 1910년 1월 4일 전북 김제 출생
● 원기 12년(1927) 11월 6일 출가
● 남부민·초량교당 교무/중앙총부 순교감/동산선원장
   중앙훈련원장/수위단원 역임
● 정식 출가위
● 법랍 49년
● 원기 61년(1976) 5월 24일 열반
● 원기 61년(1976) 종사 추서

공타원 조전권 종사는 1910년 1월 4일 전북 김제군 금산면 구월리 어유동에서 경산 조송광 정사와 모친 최형엽 여사의 5남 6녀 중 넷째로 출생하였다. 7세에 어머니를 여읜 뒤 고생하는 새어머니를 정성으로 모셔 효녀 심청이라 소문이 났다. 기독교 집안이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교회 일에 아주 열심이어서 교리문답이나 대토론회는 언제나 1등이었으며, 남자처럼 활달하게 일할 수 있는 여자전도사가 되어 예수님의 사랑으로 전 조선 여성을 개화시켜야겠다는 이상에 부풀어 있었다.
16세에는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출하여 미션스쿨인 전주기전여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이 해에 예수교 장로였던 부친은 소태산 대종사의 정식 제자가 되고 ‘송광’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기전여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공타원 종사는 부친의 개종 사실에 분개하여 마귀의 유혹에 빠져 사교를 신앙하는 부친을 구하기 위해 원기 12년 익산총부에 왔다가 소태산 대종사를 뵙고 제자가 되었으며, “세계 대권을 잡고 일체 중생의 어머니가 되어 최령한 가치를 발휘하라”는 뜻으로 ‘전권(專權)’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원기 13년 3월 27일 정묘동선 해제를 기하여 전무출신을 서원하고 농공부 공양원을 시작하여 동년 7월부터 서울교당 공양원으로서 4년 동안 근무하였으며 소태산 대종사와 은부모시자녀 결의를 맺었다.
공타원 종사는 그 타고난 덕과 포용성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감화를 주었다. 농촌벽지, 도회지 할 것 없이 방방곡곡 교당에 안 다닌 데가 없고 한번 단상에 올라서면 좌우통달 막힘이 없는 진리소식과 언변으로 뭇 대중을 법열로 이끌었다.
원기 51년 평소 지병이 있어 다섯 차례 수술 받았던 것이 재발하여 근치할 작정으로 진찰한 결과 6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불치병(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공타원 종사는 계속 지방 순회 강습을 다니면서 병구의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편안하기를 원치 않고, 추운 겨울날 일백길이나 되는 우물물을 손수 길어다 썼다. 공타원 종사를 두고 흔히들 ‘좋다보살’이라 하는 건 누구든 무슨 일이든 좋다고만 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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