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현실에서 멋지게 구현하려는가?
그러면 <도덕경>을 읽어라
 
글. 김정탁

노자는 상·하 두 편, 그리고 총 81장으로 구성된다.
상편은 37장으로 도(道)를 말하고, 하편은 44장으로 덕(德)을 언급해서 도경(道經)과 덕경(德經)으로 각각 불리는데, 이 양자를 합해 우리는 <도덕경>이라고 부른다. 도경은 도의 본체나 도의 근본에 관한 설명으로 체(體)에 관한 내용인 반면, 덕경은 도에 입각해서 살아가는 모습으로 용(用)에 관한 내용이다. 참고로 우리가 흔히 접하는 왕필본 <노자>에 훨씬 앞선 백서본(帛書本) <노자>는 상편과 하편이 서로 뒤바뀌었기에 <덕도경>으로 불리는 게 마땅하다.  

<노자>가 도와 덕, 양경으로 나뉜 건 한(漢)나라 때부터인 듯싶다. 그리고 <노자>를 도덕경 세 글자로 통칭해서 부르는 건 당(唐)나라 때부터 시작된 관습인 듯하다. 그런데 <노자>에 상과 하 두 편의 구별이 왜 생겨났는지, 또 81장의 배열이 왜 그런지와 관련해 의문 나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리고 <노자>는 같은 도가계열의 책이지만 <장자>와 달리 치밀한 기획 하에 체계적으로 편찬되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단편적인 말을 잡다하게 집성한 책으로 보일 뿐이다. 그래서 노자가 직접 쓴 글인지 여부가 여전히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

베일 속에 가려진 건 이뿐만이 아니다. 노자는 과연 실존했던 인물인가? 또 실존했다 해도 노자가 직접 집필한 걸까? 또 직접 집필했더라도 우리가 흔히 접해왔던 왕필본(王弼本) <노자>와 그 내용에서 차이가 있을까? 우리는 이 의문에 대해 어떤 답도 제대로 할 수 없다. 그렇더라도 이런 의문에 대한 답변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지금까지 기록되고 언급된 내용들을 한번쯤 검토할 필요가 있다.
노자에 대한 첫 번째 공식적인 언급은 사마천의 <사기>에 있다. 사마천은 노자보다 불과 5백 년 후에 살았던 사람이므로 사마천의 이 기록은 어느 정도 신빙성을 지닌다. <사기>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에 등장한 노자에 대한 언급은 다음과 같다.

‘노자는 초나라 고현(苦縣, 지금의 河南省 鹿邑 동쪽)의 려향(鄕) 곡인리(曲仁里) 사람이다. 성은 이(李)이고, 자는 담(聃)인데 주(周)나라 수장실의 사관을 지냈다. …… 그가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렀을 때 관령 윤희(尹喜)가 말했다. “장차 은거하려 하십니까? 저에게 글을 남겨 주십시오.” 이에 노자는 상편과 하편을 저술해 주었으니 이것이 도덕에 관해 쓴 글 5천 자이다.’

이에 대해 <신선전(神仙傳)>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느 날 함곡관을 지키던 관원이 새벽에 일어나서 보니까 동쪽 중국 본토로부터 보라색 기운이 서쪽 변경을 향해 왔다. 그걸 본 관원은 오늘 틀림없이 성인(聖人)이 관문을 지나갈 거라고 단정하고 그에게 도를 구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과연, 수염과 머리가 온통 하얀 노인이 푸른 소를 타고 느릿느릿 함곡관으로 다가왔다. 관원이 관첩을 내놓으라고 독촉했음에도 노인이 내놓지 못하자 이내 본색을 드러냈다. 관첩이 없으면 법에 의거해 관문을 통과할 수 없는데, 관문을 꼭 통과하고 싶으면 도를 전하면 된다. 노인은 하는 수없이 그렇게 하겠노라 하고 억지로 써 주고서 관문을 겨우 통과할 수 있었다.

당시 함곡관 관원이었던 윤희는 5천 자에 달하는 노자의 글을 얻은 후 자신도 도를 깨달았다. 그러자 관직도 팽개치고, 임무 교대도 하지 않은 채 머리에 관을 쓰고 떠난 후 윤희 역시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도교(道敎)는 중국에 이렇게 해서 전해졌다고 한다. 그러니 노자에서 관윤자(關尹子, 함곡관 관리 윤희)로 전해지고, 다시 후대로 전해져서 호자(壺子), 열자(列子), 장자(莊子)로 이어졌다. 이런 경로로 전해 내려오다 당(唐) 왕조에 이르러서 마침내 국교로 변신하자 <노자>가 도교 삼경의 으뜸 경전으로 자리 잡았다.1) 

당 왕조 때 <노자>가 이렇게까지 높이 받들어진 건 노자 이름이 이이(李耳)라는 주장도 있다. 그래서 같은 이(李)씨 성이었던 당 왕조에서 그를 더욱 신격화한 결과 현종(玄宗) 때 와선 <노자>를 <도덕경>으로 존숭했으며, <장자>도 <남화경(南華經)>이라고 추존해 불렀다고 한다. 그렇지만 도가사상은 중국사회에 그 뿌리를 일찌감치 깊이 내려올 정도로 유행했다. 
은(殷)나라 탕왕 때 이윤(伊尹)과 부열(傅說)이나 주(周)나라 개국 때의 공신 강태공(姜太公)도 도가를 추종한 인물 중 하나이다. 또 춘추시대 제(齊)나라 사람인 손무(孫武)의 군사철학도 도가사상에서 유래한다. 그가 쓴 병법 중 열세 편 내용에는 도가사상이 잘 반영되어 있다. 게다가 열세 편 내용에 녹아 있는 군사철학은 시공을 초월해 수천 년이 지난 지금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범려(范)도 월(越)나라 왕 구천(句踐)을 도와 나라를 되찾게 했는데 이를 위해 이용한 학설이 도가사상에서 비롯된다. 그뿐만이 아니라 구천이 나라를 되찾은 후 범려는 논공행상에서 높은 관직을 얻을 수 있었지만 부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서시(西施)를 데리고 표연히 일엽편주를 타고 태호(太湖)로 떠났다. 이것은 ‘공을 이루고 명성을 얻으면 물러가는 게 하늘의 도이다(功成名遂身退 天之道也).’라는 이치를 몸소 실천한 도가적 풍모에서 비롯된다.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도가가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건 한(漢)나라 고조 유방(劉邦)의 창업 초기 때이다. 당시 가장 큰 공적을 세웠던 장량(張良), 진평(陳平) 같은 인재가 모두 도가를 배운 사람들이다. 또 한나라 초기 문경지치(文景之治)의 태평성세를 구가했던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부자 역시 황로(黃老)의 도가 학설을 자신들의 치도사상으로 삼았다. 이건 <노자>를 배우기 좋아한 이들 어머니의 교육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문제의 모친은 도가의 청정무위(淸淨無爲) 노선을 좋아했다. 이런 가정교육과 시대조류 영향으로 인해 문제는 도가의 정치철학을 깊이 있게 보여주었다.

삼국 시대의 제갈량도 도가에 속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당 태종의 정관지치(貞觀之治)는 물론이고, 당 현종에서 명(明) 황제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초기에 사업을 일으키는 데 이용한 건 모두 도가의 학술이다. 또 만주족이 겨우 4백 명을 이끌고서 산해관(山海關)을 넘어와 당시 4억 인구의 중화 민족을 통치하고 청(淸) 제국을 세웠는데, 이들이 이끌었던 책략과 정치사상은 도가의 학술이다. 그래서 이들은 <손자병법>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고, 다른 병법서도 잘 활용하지 않았다. <노자>를 연구해서 정치, 경제, 교육, 군사, 사회 등 각 방면에 이용했다. 특히 강희제(康熙帝) 이후 청나라 역대 왕조 정치를 자세히 연구하면 이들이 노장철학을 잘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수천 년 중국역사를 크게 조망하면 하나의 비밀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왕조는 그 전성기에 정사를 처리함에 있어 공통된 비결이 하나 있는데, 간단히 말해서 ‘안으론 황로(黃老)를 사용하고, 밖으론 유술(儒術)을 드러내 보인다.’라는 거다. 한·당(漢·唐)으로부터 송(宋)·원(元)·명(明)·청(淸)에 이르기까지 각 왕조의 창건시기에는 특히 그러했다. 즉 내재되어 있는 실제적인 영도 사상은 황로(黃老)의 학술, 즉 중국 전통문화 속의 도가사상이다. 그렇지만 겉으로 표방한 건, 즉 선전이나 교육상 표방한 건 공맹의 사상이고, 유가문화이다.

<노자>는 5천 자에 불과해 시어처럼 간략하지만 많은 함축적인 뜻을 지닌다. 그래서 한 글자가 하나의 관념을 지니는 좋은 문장이며, 한 구절이 심오하고 중요한 뜻을 내포하는 좋은 글이다. 우리는 흔히 유가는 낮의 철학이라면 도가는 밤의 철학이라든지, 유가는 활동하는 시기에 요구되는 철학이라면 도가는 은퇴 이후의 철학이라면서 도가사상을 현실에서 끌어내려는 풍조가 강하다. 그렇지만 이런 구분은 너무나 도식적이다. 도가사상도 현실 참여적 측면이 강해 <노자>가 말한 내용을 떠받들어 이를 실천에 옮겨 세속적으로 성공하는 사람을 주위에서 곧잘 발견할 수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신흥부자로 떠오르는 젊은 기업인들도 그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Ι교수·성균관대학교 소통학. smilejtk@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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