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덕의 기록 <삼밭재 초막> 검토①

- 그 동기와 명칭 -

글. 이정재

삼밭재 기도는 2차에 걸쳐 이루어졌고, 그에 대한 사연을 앞서 살펴봤다. 이제 초막 자체에 대한 검토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 먼저 박용덕이 기록한 초막에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자. 그는 초막을 단순한 기도처로 이해하고 있다. 초기의 기록이기에 자료적 가치가 있기는 하지만 심도 있는 접근에는 미치지 못한 한계가 있어 보인다. 그 한계는 기초자료들 안에서도 서로 충돌하는 내용으로 드러난다. 유의미한 자료는 취하고 부족한 부분은 보강을 할 필요가 있다.
박용덕이 기록한 ‘삼밭재 초막’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즉 그 건립 동기, 연대, 규모 및 명칭 등에 관한 것이다. 초막을 건립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른바 도사라고 자칭하는 무리들을 무수히 접해보고 이 모두가 허위와 사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고, 이제 제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는 비상한 결심을 한다. 처화는 집을 나가 혼자 공을 들이기로 하고 부친께 구수산 삼밭재에 집을 하나 지어달라고 간청을 한다.’

<원불교사전>의 설명과는 달리 여기서는 처화가 기도에 대한 의지가 있었음을 강조한다. 밑줄을 그은 부분 ‘집을 나가 혼자 공을 들이기로 하고’와 ‘부친께 초막 건립을 부탁’하는 내용이 그것이다.
처화, 이때의 나이는 19~20세 경으로 이미 장성한 단계다. 당시 첫 아이가 태어나 처화는 아버지가 된 시점이다. 부친은 당시 환갑의 나이였기 때문에, 부친께 초막 건립을 의뢰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혼자 공을 들이기로 하고’라 했던 의지를 볼 때 초막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지어야 자연스럽다. 그리고 당시는 처화가 아프지 않았던 시기다. 그러므로 박용덕이 기술한 초막 건립의 동기는 이해하기 어렵다.

초막의 형태와 규모에 대해서는 이설이 없는 듯하다. 박용덕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이 건축물은 마을의 여염집처럼 구색을 갖추어 번듯하게 지은 것이 아니다. 근방의 나무를 베어다가 칡넝쿨을 걷어 개미절터 자리에 판판하게 터를 잡아 얽어 세운 삿갓집이었다.’
서대원은 1936년 <성지순례기>에서 ‘삼밭재의 거처하시던 건물 주초석 한 개라도 찾고자 주변을 더듬었다.’고 하는데, ‘삼밭재 초막은 그런 구조물이 아니며, 수간의 정사도 아니다. 이때의 집안 형편이 채무가 상당한 지경으로 그런 경제적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초막이 혼자 구도를 하겠다는 목적으로 지어진 것이라면 그 기능에 맞는 규모도 어느 정도는 정해져야 했으나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근방의 나무나 칡넝쿨을 걷어 지은 임시거처 정도의 집이었던 것 같다. 이런 초라한 모습의 초막은 여러 가지로 불렸는데, 초막에 붙여진 명칭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초막은 공부실, 수도실, 정사, 기도막, 초막, 삿갓집 등으로 불리었다.’(<초기교단사>, 152쪽).
뒤의 둘(초막, 삿갓집)은 외관을 본떠 붙인 이름이고, 앞 셋(공부실, 수도실, 정사)은 기능을 두고 붙인 명칭이다. 그 기능은 단연 독공과 기도에 해당하는 것으로 독경연마와 맞닿아 있다. ‘정사’는 죽림정사 같은 석가모니의 회상이 연상되고, ‘수도실’과 ‘공부실’은 대종사 대각 후 지어 공부를 하였던 ‘구간도실’의 이미지가 반영된 명칭이다. 둘 다 훗날 붙여진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본래의 순수 기능이 잘 남아 전하는 용어는 중간에 있는 ‘기도막’이 되겠다. 풀로 지어 만든 ‘초막’은 기도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기도는 앞의 수도와 공부가 같이 곁들여져야 한다. 독경 수행의 별칭으로 보이며 그의 서로 다른 관점에서 붙여진 이름임을 알 수 있다.

결국 특별한 하나의 명칭을 붙이지 못하고 여럿이 된 데는 처사일화의 곡절이 배후에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초막은, 기록대로라면 사용하지도 못했던 것이 아닌가. 지어만 놓고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기능적인 이름을 붙일 수 있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초막은 사용을 한 바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독경연마를 염두에 두고 유사한 수행관련 용어를 붙여준 것이다. 소태산이 대각을 하자 이 초막 독경터는 ‘각(覺)’이라는 격에 맞추어 정사, 공부실, 수도실 등으로 변칭을 하였던 것이다.

용어들 간의 규모와 부여된 의미가 서로 상충하는 점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정사는 보통 ‘학문수련이나 수행을 목적으로 지은 대규모의 건축이나 집단지’를 지칭한다. 한편으로 대규모의 공동 수행을 목적으로 한 죽림정사 같은 승단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용어다. 수도실과 공부실이 이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그 규모와 공식적인 형태에 미치지 못한다. 더구나 기도막과 초막 혹은 삿갓집이란 명칭은 정사라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명칭들의 혼재는 그 명칭을 부여한 의도가 달랐기 때문임을 알 수 있고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삿갓 모양(‘삿갓집’)의 ‘초막’은 원래 독경을 하던 ‘기도막’이었다. 소태산 대각 후 이를 기려 ‘수도실’, ‘공부실’이라 높여 불렀고, 최종적으로 ‘정사’라는 높은 명칭까지 붙여준 것으로 명칭의 변화과정과 순서를 가늠할 수 있겠다. 한 장소와 한 건물이 이처럼 다양하게 불린 것은 그 용도가 짧고 분명하지 않았던 점도(내림에 이은 독경연마는 내밀한 면이 없지 않다) 있었겠지만, 내림 직후 이어진 독경 수행의 은폐 혹은 순화의 표현이 아니었나 추정된다. 사실 독경도 또한 넓게 보면 수도요 공부였으니 틀린 말은 아니나 ‘정사’는 지나친 명명이었다 할 수 있다.

오늘날도 독경수행을 ‘기도한다.’고 한다. 기도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오랜 전통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 초막을 지은 당사자가 누구인지도 중요하다. 이미 언급했듯이 처화의 외삼촌이 시공자로 나섰다(칠산 유건이 아닌 그의 형 유선숙).
‘박성삼은 처음엔 아들의 하는 일을 이해 못하고 반대도 하였지만 차츰 그 정성에 감동하여 …… 박성삼은 처남 유선숙을 시켜 삼밭재 마당바위 옆에 초막 하나를 지어주게 하였다.’

밑줄 친 부친의 행적은 순서가 반대로 되었다. 처음 나이가 어릴 때는 그 정성이 기특하여 적극 지지를 하고 도와주기도 하였으나, 나이가 들면서는 상황이 달라졌어야 한다. 첫 아이를 본 아버지가 여전히 산에 올라가 기도를 하겠다고 하는 청은 어느 누구라도 들어주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초막은 지어졌다. 자신의 의지로 인한 것이 아니라 부친과 가족의 염원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초막을 지어 기도를 한 것은 어떤 생업과 관련이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초막 건립도 자신이 아닌 타자에 의해 지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필 외삼촌을 시켜 짓게 하였는가에 대한 점도 궁금하다. 자신이 수도하여야 할 장소에 힘을 거들었다거나 둘이서 같이 지었다던가 하는 언급이 없는 점은 더욱 그렇다. 두 기록 <창건사>와 <약전>이 전하는 내용, 즉 처화가 원하여 지어달라고 했던 동기는 정황상 서로 배치되는 사항이다. 처화의 수도에만 전념하겠다는 자세와 정성에 비례해 볼 때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수행처라면 자신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어야 옳다. 그러나 그 반대의 처사를 한 것은 이 초막의 건립이 자의에 의해 진행된 것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창건사>에 전하는 다음의 내용이 납득이 되는 부분이다.
‘그리하야 처음에는 생활에 대한 계교심도 혹 있었고’

초막 건립은 부친과 주변 가족들의 의도에 의해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성화와 압력에 의해 처화는 초막으로 올라가 독경공부를 하여야 했던 것이다. 외삼촌의 개입으로 인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모친은 물론 일가친척이 모두 이 일에 적극적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처화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자신의 고집, 즉 구도 행각을 정리하고 가족 친지가 마련하고 요구했던 조건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던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Ι교수·경희대학교 민속학연구소장. hogo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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