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풍경

글. 정인신

우와! 아름다워라…. 새벽기도를 마치고 나오며 만난 하늘, 붉은빛으로 퍼지는 그 빛에 나도 잠시 하늘이 되어봅니다. 늘 다른 모습의 하늘이지만 ‘링링’이라는 이름의 태풍이 지나간 뒤에는 하늘을 수놓는 구름의 모습도 달라졌네요.
법당 뒤뜰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링링’이 넘어뜨린 소나무를 만나러 간 거죠. 아름드리 홍송이 뿌리째 뽑혀 누워있는데 보는 사람마다 찬사를 보냅니다. “대박! 감동! 예술이야! 사은님이 도와주셨어, 교무님 기도의 위력인가 봐요….” 나는 몇 번이고 나무를 쓰다듬으며 고맙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진도 찍어 나르며 그 감동을 함께 공유했습니다.

사실 소나무는 법당 지붕을 얼마든지 칠 수 있는 자리에 서 있었거든요. 그런데 어깨를 비스듬히 돌려 지붕과 담 사이 그 작은 공간에 몸을 뉘었습니다. 굵은 전선줄이 받쳐 주어 담도 무사했지요. 이제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추석 명절에 교당에 들렀던 나무전문가 교도가 기계톱으로 순서 있게 나무를 자릅니다. 그 모습이 또 예술입니다. 소나무 향기가 집안 가득하네요.
나무를 떠나보내고 누군가 일러준 대로 막걸리 한 병을 주변에 뿌리며 위로했습니다. 언제 이곳에 왔는지 모르겠지만 함께 숨 쉬며 살아온 세월 고마웠다고….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때가 되면 떠나는 일이라고…. 나무전문가가 그 나무로 어떤 작품을 만들어낼지 기대가 된다고….

‘링링’이 찾아오기 며칠 전 또 하나의 이별이 있었습니다. 지난해 가을이었죠. 오덕훈련원에서 알게 된 지인이 전화를 걸어 “사진을 잘 찍는 작가가 있어 교무님을 소개했으니 모델이 되어보라.”고 했습니다. 나는 단번에 거절했지요. 그런데 내장산 단풍이 아름다운 날, 그 작가가 내장산으로 내려와 우리를 초대했습니다.
주위 교무님 몇 분과 소풍 삼아 갔더니 첫 인사가 “교무님 젊으시네요.” 합니다. 아마 나이가 많은 할머니로 생각했나 봅니다. 그가 정해준 자리에 서서 “여기 보세요, 저기 보세요.” 하는 말에 맞춰 찍은 사진이 30여 장, 사진을 보며 역시 작가구나 생각했습니다. 액자에 넣어 보내준 고운 단풍나무와 흰 저고리가 어울리는 가을풍경이 아름다워 이 가을 다시 꺼내놓고 바라봅니다.

그는 가끔 카톡으로 계절에 어울리는 사진을 보내오며 안부를 전했습니다. 그가 보내오는 사진을 기다리고 풍경이 아름다워 감동했었는데 그가 암 투병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서정주 시인의 ‘난초’라는 시를 사진과 함께 보낸 후 이 가을 홀연히 길을 떠나버렸습니다.
우리 집 홍송이 바람에 쓰러진 것처럼 그분도 고단한 삶 속에서 몸을 강타한 암을 이겨낼 수 없었나 봅니다. 자연을 사랑하고 순수한 감성을 지닌 그가 좋은 풍경을 사진에 담아내 전시회 열기를 기대했는데 말이죠. 만남과 이별이 연결되는 세상에서 누구라도 삶과 죽음이 향기로 남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가을은 바람을 타고 오나 봅니다. 지구 온난화로 수면의 온도가 올라가면서 태풍이 발생하여 기록적인 강풍을 불리기도 하지만 크고 작은 바람으로 지구의 열기를 식히고 가을의 문을 활짝 열어주나 봅니다.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들녘을 걸어봅니다. 태풍에 휘둘린 벼들이 쓰러져 있기도 하지만 따가운 초가을 햇볕에 알곡들이 속 깊게 익어가고 있네요. 가을풍경을 잘 그려놓은 김용택 님의 ‘가을’이라는 시를 옮겨 봅니다.

해질녁 먼 들 어스름이 내 눈 안에 들어섰습니다.
윗녘 아랫녘 온 들녘이 모두 샛노랗게 눈물겹습니다.
말로 글로 다할 수 없는 내 가슴속의 눈물겨운 인정과
사랑의 정감들을 당신은 아시는지요.
해지는 풀섶에서 우는 살아나는 불빛을 찾았습니다.
내가 가고 해가 가고 꽃이 피는 작은 흙길에서
저녁 이슬들이 내 발등을 적시는
이 아름다운 가을 서정을 당신께 드립니다.

시골에 살며 날마다 변화하는 가을풍경을 볼 수 있는 삶도 행복입니다. 하늘이 가득 담긴 마당을 거닐고, 텃밭을 가꾸며 고추랑 가지를 오시는 분들과 나눌 수 있는 일도 기쁨입니다.
오늘은 들길에 피어있는 여뀌를 한 아름 꺾어왔습니다. 꽃인지 열매인지 모를 작은 봉오리가 다닥다닥 매달린 보랏빛 야생초인데, 기도방 한쪽에 백일홍 몇 송이와 함께 꽂아놓고 바라봅니다. 자연이 내어주는 선물 가을풍경입니다. 땡감이 익어가는 감나무를 까치들은 벌써부터 기웃거리고 나무도 아름답게 옷을 갈아입는 이 가을! 우린 어떤 모습으로 익어가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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