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
사느라 참 애쓰셨습니다”

취재. 노태형 편집인

가을이 떠나갑니다.
빈들에 선 낟가리처럼 우두커니 서서 하얀 한숨을 토해냅니다. 졸졸졸, 한동안 잊고 살았던 외로움이 내 마음 속 개울을 건너갑니다. 함께 있어도 외로운 계절. 슬픔은 세월로 씻어낼 수 있지만 외로움은 오래된 우물 같아서 공허한 메아리처럼 맴돌 뿐이죠.
“오늘 하루, 사느라 참 애쓰셨습니다.”
낯선 누군가가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리듯 들려주는 나지막한 소리에 괜히 눈물이 핑 돌더라는 어느 지인의 이야기. 요즘, 위로 받을 곳이 참 많이 사라진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자기 팔 자기가 흔든다.’는 식으로 각자도생의 길을 혼자 걸어야 하는 우리 사회가 무섭게도 느껴집니다.

옛날에는 어머니들의 새벽 잔소리가 참 따듯했습니다. 밥 짓는 소리처럼 매일매일 반복되는 그 잔소리가 마음을 챙기게 만들었죠. ‘부지런만 해도 밥 굶지 않는다.’는 그 시절의 위로처럼, 말이죠.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면 가장 먼저 줄이는 게 잠이었습니다. 젊은 혈기로 밤을 낮 삼아, 줄이고 줄인 잠으로 보상 받기를 원했죠. 내 가족의 행복은 가장의 잠자는 시간과 비례하던 시절, 말이죠. 간혹 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 안개 길을 따라 퇴근하면서도 흐뭇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세상 흐름이 빨라지면서 잃어버린 게 참 많습니다.
터덕터덕 걸어도 누구 하나 발 맞춰 주는 사람 없고, 먼저 내달려도 따라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세상이 풍족해지면서 사람들의 욕심은 더 많이 커져 버렸습니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채워지지 않는 아귀처럼 사람들은 욕심과 욕정에 굶주려합니다. 채우면 채울수록 더 허기져 밑 빠진 장독에 근심걱정만 가득 채웁니다.

그러니, 사는 게 얼마나 애쓰는 일이겠습니까. 오늘 하루를 무사히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큰 행운이고 행복이겠죠. 아니, ‘그래. 좀 가난하게 먹고 살자. 좀 나누며 살자.’ 이 마음먹기가 우리의 하루하루 허기를 채울 수 있는 유일한 비법 아니겠어요. 하루가 흘러갑니다. 한 달이 흘러갑니다. 그리고 어느새 한 해가 흘러갑니다. 그동안 얼마나 마음을 챙기며 사셨나요?

지금은 고인이 되신 어느 스승님에게 질문했습니다.
“일생의 지혜를 알려 주십시요.”
“산다는 건 모두 상처야.”
“상처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잘 살거나 못 살거나, 많이 가졌거나 빈털터리거나, 잘 났거나 못 났거나, 막론하고 다 상처를 안고 살아가지. 10년을 산 사람은 10년 치의 상처가 있고, 50년을 산 사람은 50년 치의 상처가 있어. 오래 살수록 그 상처는 점점 깊어져. 그래서 죽는 거지.”
“이것과 저것은 서로 양 끝인데, 어찌 똑같은 상처가 됩니까?”
“가진 사람은 더 못 가져서 상처가 되고, 빈털터리는 허기져서 상처가 된다네.”
“그 상처는 어떻게 치료해야 합니까?”
“그래서 종교가 필요하지. 종교인들의 따듯하고 지혜로운 마음만이 그 상처 난 사람들을 위로해 줄 수 있어.”
하루하루 사느라 참 애쓰셨습니다. 가족들에게, 동료들에게, 그리고 지인들에게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 보시죠. 겨울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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