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릉 계곡에서
산은 하늘에 걸려
흔들리고

물은 마음을 타고
흐른다
취재. 노태형 편집인

‘오늘은…(찌지직) 오늘은…(지직) 오늘은…(찌지직).’
하루를 정리하는 라디오 소리가 아득히 멀어집니다. (이제 일어나, 정신 차려야지.) 퍼뜩 눈을 뜨면, 아련한 기억들이 흘러갑니다. 주위를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낮과 밤의 경계선’이 보이지 않습니다. (1900년대는 그나마 시간이 느리게 흘렀습니다.)

2019년.
‘실시간, 초 단위, 5G, 불야성, 24시, 초고층, 쇼핑, 금융, 재테크….’
불면증에 시달리는 도시의 현대인들은 밤을 잊은 지 오래입니다. 숨이 막힐 것처럼 팽팽히 돌아가는 현대의 시간은 각종 전자기기의 초단파를 이용해 인간의 삶을 은밀히 감시합니다. 냉장고와 TV와 광통신망의 불빛은 지칠 줄을 모르고, 충전기와 스마트폰은 파랗게 날 선 빛으로 간섭의 눈을 떼지 않습니다. 이유 없는 불안이 울화통으로 번집니다. 가진 자의 불만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고, 가지지 못한 자의 불안은 나락에 걸린 올가미가 되었습니다.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의 밤거리는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술렁이는 사이보그들로 넘실댑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아니, 나는 누구인가요?)

“산이 높은 시골로 이사 갈까? 바닷가는 어때?” “…좋지….”
“갈 마음은 있는 거야?” “늘 가고 싶지.”
“언제 갈 거야?” “그러게. 한 10년 뒤…?”
“왜 10년 뒤야? 7년 전에도 10년 뒤라고 했는데….” “지금은 바쁘잖아, 아직 해야 할 일도 많고…, 돈도 좀 더 벌어야지.”
“정말 갈 마음이 있기는 있는 거야?” “가고 싶긴 하지만, 때가 좀….”
“에구. 그냥 일속에나 파묻혀 사세요. 평생 못 가겠네, 뭐~.”
일상에서 반복되는 올가미가 늘 목 가까이서 넘실댑니다. 도시 한복판에서 콘크리트 빌딩을 그늘 삼아 살아가는 자에게 ‘느림’과 ‘여유로움’은 사치가 되었습니다. 고요하면 불안하고, 외로우면 질식할 것 같은 나날들로 영혼의 강줄기는 메말라 갑니다. (우린 무얼 위해 살까요? 누굴 위해 사는 거죠?)

터덕터덕 산길을 걷습니다.
높은 바위산을 넘던 구름이 잠깐 나무에 걸렸나 봅니다. 몇 번 몸을 뒤척이더니 비를 살짝 뿌리고선 몸이 가벼워졌는지 훌쩍 고개를 넘습니다. 덕분에 가파른 바위 아래로 폭포가 생겨나고 계곡물 소리는 더욱 힘차집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바위 위에는 임자를 잃은 푸른 솔이 파랗게 흔들립니다.
산도 나무도 바위도 물도 제각각 무어라고 떠드는데 아무도 그 소리에 간섭하지 않습니다. 산은 하늘에 걸려 흔들리고, 나무는 바람에 걸려 부산하고, 바위는 구름에 걸려 흔적을 지우며, 물은 마음을 타고 흐릅니다. 무릉도원. 신선이 어찌 따로 있을까요. 이 모든 게 신선인 걸요.

어느 스님의 시 한편을 옮깁니다.
‘옳거니 그러거니 내 몰라라
산이든 물이든 그대로 두라
하필이면 서쪽에만 극락세계랴
흰 구름 걷히면 청산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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