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소는 지금
어디 있을까?

글. 박정원  월간<산>  편집장·전 조선일보 기자

마음은 원래 아무 것도 없는 잠잠한 상태다. 아니 있을 것도 없고, 없을 것도 없는 언어도단의 자리다. 무념무상, 즉 모든 생각을 떠나 마음이 텅 빈 무아의 상태다. 이른바 자성(自性)의 자리다.
그런데 경계가 들어온다. 사람인지라 경계가 들어올 수밖에 없다. 길을 가다가 발목이 접질리면 아파서 어쩔 줄 모른다. 마음은 온통 다리에 집중돼 있다. 그때 옆에 있는 사람이 뒤통수를 툭 친다. 마음은 다리에서 다시 뒤통수로 옮겨간다. 잠시 아픈 다리도 잊는다. 뒤통수에 집중한 마음은 어느 순간 또 자리를 옮긴다. 무한한 경계에 오락가락, 왔다 갔다 하는 게 마음이다.
목우십도송(牧牛十圖頌). 마음을 찾아 길들이고 닦아가는 열 가지 단계를 상징적으로 그렸다. 오락가락하는 마음을 닦아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①미목(未牧). 길들이기 전, 본능적으로 마음이 방자하고 객기의 충동에 휩쓸리는 경지다. ②초조(初調). 길들이기 시작하는 단계, 수도에 뜻을 두어 밖으로 흩어지는 마음을 붙들어 매기에 애를 쓰는 경지다. ③수제(受制). 점점 마음이 길들여져 마음을 챙기면 상당히 골라지는 경지다. ④회수(回首). 머리를 돌이키는 일구월심 공을 쌓아 어느 정도 힘을 얻었으나 아직 방심할 수 없는 경지다. ⑤순복(馴伏). 길들여지는 단계, 마음을 챙기고 놓아 보는 것이 자연스러워 어느 정도 마음이 한가로워진 경지다. ⑥무애(無). 걸리고 막힘이 없는 단계, 마음을 애써서 챙기지 아니해도 크게 어긋나지 아니하여 어떠한 일에나 거의 걸림이 없는 경지다. ⑦임운(任運). 자유로운 단계, 마음을 경계에 따라 놓아보되 그 경계를 이겨내어 한결 자유로워진 경지다. ⑧상망(相忘). 주관과 객관이 서로 잊는 단계, 마음과 경계가 한 경지가 되어 일제 돈망에 드는 경지다. ⑨독조(獨照). 홀로 찬란히 비치는 단계, 일체 돈망의 경지에서 낭낭독존한 영지의 광명이 드러나는 경지다. ⑩쌍민(雙泯). 일원상만 두렷이 나타나는 단계, 돈망과 영지가 하나로 어우러져 만상 그대로가 법신으로 나타나는 경지다.
내 마음의 소만 제대로 다스려도 어떤 경계가 들어와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걸 알면서도 실천은 무척 어렵고 힘들다. 아는 것과 마음이 오락가락 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 같다. 경계가 들어오는 마음을 놓기 위해서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을 잘 내려놓는 공부법이 따로 있을까? 이런 생각까지 든다.
마음을 비유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마음은 개인 역사의 거울인 것 같다. 마음속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녹아 있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 미래에 일어나리라 예상되는 일들이 모두 내 마음속에서 왔다 갔다 한다. 과거에 있었던 수많은 일들은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다. 현재 하고 있는 일과 전혀 상관없는 과거 일이 가끔 떠올라 현재를 괴롭힌다. 경계가 온 것이다. 몸은 현재인데 마음은 과거로 가 있다. 순간 정신 차려보면 이미 경계가 훅 들어온 상태다. 이 마음을 어찌할꼬.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히질 않는다. 번뇌망상(煩惱妄想)이 괴롭힌다.
과거만 그런 것도 아니다.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 일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노후에 뭐 먹고 살지.’부터 ‘어떻게 하면 잘 죽을까.’까지. 완전 기우(杞憂)다.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하는 것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한때 이런 생각들을 내려놓기 위해 사람들과의 만남을 확 줄였던 적이 있다. 나한테 스트레스 주는 사람, 만나서 피곤한 사람, 만나서 불편을 느끼게 하는 사람 등을 가급적 만나지 않기로 했다. 그게 몇 년은 흘렀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않은 일이 스멀스멀 생겼다. 나의 의사와, 의지와, 나의 행동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들이었다. 아마 누군 만나고 누군 안 만나서 생긴 소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만난 사람들이 내가 하지도 않은 행동, 생각하지도 않은 내용을 만들어 퍼트린 소문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때 느꼈다. ‘아, 이 세상은 혼자서 살 수도 없고, 혼자 있으면 안 되는구나.’라고. 싫든 좋든 관계를 맺으며 서로 부딪히며 생활해야 나를 보호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금 피곤하고, 가기 싫어도 나를 위해서 기꺼이 가서 관계를 맺어둬야 쓸데없는 소문이 들려오지 않을 것 같았다. 나이 들어 농담 삼아 ‘빠지지 말고, 삐지지 말고, 용서하며 살자.’의 줄임말인 ‘빠삐용’을 말하곤 하지만, 이도 실천하기 쉽지 않다.
그런 불편한 기억들이 심심하면 떠올라 사람을 불편하고 불쾌하게 만든다. ‘단절을 시켜야지.’ 하지만 언젠가 또 스멀스멀 떠오른다. 마음을 완전히 비우지 못한 까닭일 것이다. 정말 불편하다. 때로는 피해자로, 때로는 가해자로 마음은 세계여행, 아니 우주여행을 하며 떠다닌다. 불편한 그 일을 기억하고 있는 마음을 완전히 끊어내야 하는데 쉽지 않다. 유무를 초월한 분별없는 자리는 정말 어떻게 만들어질까? 참회와 용서, 그리고 성실하면 해결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 과거의 잘못을 용서와 참회로 명확히 매듭을 짓고 현재에 성실하면, 현재와 미래의 걱정을 동시에 덜 수 있을 것 같다. 이것도 머릿속에서 인식은 가능한데 현실 실천이 잘 될지 모르겠다. 공자의 실천궁행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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