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소견 있게
대답 잘 했다.”

아홉 살에 정읍 동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십 리가 넘는 길을 통학했는데 2학년쯤부터는 무엇인가 골몰히 생각하는 아이가 되었다. 이 무렵 부친께서 모친에게 “작은댁을 들여 재미있게 살자.”고 하자 모친은 쾌히 승낙했다. 부모님은 45세 동갑인데 작은 어머니(봉타원 하성봉)는 25세였다. (중략) 이렇게 얼마를 지났는데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작은 어머니에게 ‘다녀가라.’는 편지를 보내주셨다. 작은 어머니가 가정 이야기를 전부 말씀드리니 소태산 대종사님은 보신 듯이 “그 영감 고집이 있어서 보라고 하면 안 볼 것이다. 그러나 내가 <회보(불법연구회 기관지)>를 보내 줄 것이니 네가 보고 책상 위에 놓아 두어라.”고 하셨다.
이렇게 불법연구회에 인연이 된 아버지는 <회보>를 통해 불법연구회를 이해하면서 3년쯤 되자 “큰 선생님은 우리집에 모시기 어려울지 모르나 그 밑의 분은 모실 수 없겠느냐.”고 작은 어머니에게 물었다. 작은 어머니는 이 소식을 바로 익산 총부로 전했다. 편지를 받은 정산 종사께서는 “그렇게 서둘지 않아도 될 것이니 기다리라.”고 답장을 보내주셨다.
이렇게 다시 2~3년이 흐른 후 아버지는 음력 섣달을 맞아 “금년 설은 절에 가서 보내야겠다.”며 작은 어머니와 떠났다. 내 나이 15살 때 일이다. 며칠 후 작은 어머니만 돌아오고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때 아버님은 소태산 대종사님을 뵙고 3개월 동선을 나고 하선까지 마치고 집에 오셨다.
작은 어머니는 소태산 대종사님과 아버님을 만나게 한 일이 그렇게도 기쁜지 아버님을 이 법에 귀의시킨 뒤로는 새 사람이 된 듯 활력이 넘치는 생활을 하였다. 아버님은 소태산 대종사님을 뵙고 두 번 큰절을 했다고 했다. 아버지가 첫 절은 인사이며 두 번째 절은 스승으로 받들겠다는 절이라고 하자, 소태산 대종사께서 손을 잡아주시며 기뻐하셨고, 아버님이 눈물을 흘렸다고 작은 어머니는 항상 말했다.
작은 어머니는 아버님을 귀의시키고 우리 가정을 귀의시키기 위해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보내주신 전령이었다.
내가 16살 되던 해 아버님이 총부에서 하선까지 마치고 돌아와 기념사진을 내놓고 설명을 했다. 또한 여자들도 익산 총부에 가면 공부할 수 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려줬다. 나에게 갈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 자리에서 “예, 가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원기 24년 12월 5일 나는 16살 소녀로 아버님과 작은 어머니를 따라 이불 한 채와 가방 하나를 들고 공부한다는 기대에 부풀어 집을 나섰다. (중략)
익산 총부 생활이 점점 익숙하여 가자 소태산 대종사님은 전무출신을 말씀하시면서 “전무출신은 똥통도 지고 밥도 해야 하는데 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몸도 약하고 식당일도 안 해보아 못 하겠다고 했다. 하루는 야회시간에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지현이는 똥통지고 밥해 먹으라면 전무출신 안 한단다.”고 광고를 하셔서 모두 웃었다. (중략)
소태산 대종사님께 칭찬받은 일도 잊혀지지 않는다. 한번은 언니 집에 갔다 왔는데 대종사님께서 “언니가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고 물으셨다. “‘언니가 무슨 일을 하며 월급은 얼마나 받느냐?’고 하기에 ‘언니는 이 집 살림을 하여주고 얼마를 받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언니가 ‘이 집은 내 살림인데 누구에게 돈을 받느냐.’는 대답에 ‘나도 불법연구회가 우리 집인데 누가 월급을 주겠느냐.’고 했더니 언니는 저의 이 말뜻을 못알아 듣는 것 같았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웃으시면서 “네가 소견 있게 대답 잘 했다.”고 하시며 잡수시던 사과 한 쪽을 ‘상’이라며 주셨다. (중략)
내 나이 열아홉에 초량으로 가라는 소태산 대종사님의 명을 받고 그 자리에서 눈두덩이 붓도록 펑펑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교화지가 척박해서가 아니었다. 우리 소태산 대종사님의 곁을 떠나 어떻게 살아가라고 그 머나먼 부산 땅으로 이 철부지를 보내고자 하시는지 야속하기만 했던 것이다.
사실 그곳에는 신제근 교무에게 가라고 하셨기 때문에 울고불고하는 언니를 달래면서 밤새 빨래를 해서 보따리를 챙겨주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느닷없이 초량에는 내가 가고 언니는 관촌으로 가라는 것이다. 하루 만에 입장이 뒤바뀌어 이번에는 언니가 밤새 내 빨래를 해주는 동안 나는 우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나를 오라고 하시고 자상한 아버지처럼 길을 몇 번이나 일러주셨다. “너 초량 알겠느냐. 부산진역·부산역·초량역이 있는데 부산진역에서 내리지 말고 부산역에서도 내리지 말고 꼭 초량역에서 내려야 한다. 가면 전권이가 마중 나와 있을 것이다. 어디 내가 뭐라고 했는지 네 입으로 다시 한 번 말해 봐라.” 그렇게 몇 번이나 앵무새처럼 복습을 했던 덕분에 첫 교화지에서 내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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