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타원 이공주의 민족독립운동
- 경성여자청년회 활동을 중심으로 -
글. 박윤철

1999년(원기 84)에 원불교 교정원 총무부가 편찬 간행한 <원불교 법훈록>은 구타원 이공주 종사의 약력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구타원 종사는 1896년 12월 23일 서울에서 부친 이유생 선생과 모친 민자연화 정사의 3남 3녀 중 2녀로 출생하였다. 부친은 이조 선조 때의 명재상이던 경주 이씨 이항복의 후손으로 당시 고고한 지조를 지키던 선비였다. 모친은 고종 황후 민비의 집안이었고 외숙부 민치장은 울진군수를 지냈으며 동덕여학교의 제2대 교장으로 근대교육에 이바지하였다. 이와 같이 구타원 종사는 명문가에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재질이 총명예지하였으며, 강의고결(剛毅高潔)한 기상을 가졌다. 6세경에 이미 부친으로부터 한글을 배웠고, 10세경에는 근대한국 여성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었던 하난사(河蘭史)로부터 한문, 산술, 초급 영문 등을 배웠다. 이어 이화학당, 동덕여자의숙,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등에서 신식교육을 받았다. (<원불교 법훈록>, 20쪽.)

위에 소개한 구타원 종사의 약력을 일견(一見)하면, 원불교 초창기에 소태산 대종사에게 귀의한 제자들 가운데, 남녀를 불문하고 최고 수준의 경력자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런데, 구타원 종사의 본명은 널리 알려진 대로 경길(瓊吉)이다.
주지하듯이, 2019년은 3.1독립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백주년이 되는 해이다. 또한 우리 원불교 1백년사에서는 ‘무아봉공’(無我奉公)을 이념으로 하는 전무출신(專務出身) 정신의 확립을 본 ‘법인성사’(法認聖事)’ 1백주년의 해이기도 하다. 바로 그런 뜻 깊은 해를 맞이하여 필자는 현재, 일제강점기에 소태산 대종사께 귀의한 남녀제자 가운데 독립운동에 헌신한 경력이 있는 선진들의 발자취를 추적 조사하는 가운데, 구타원 종사가 젊은 시절에 경성여자청년회(京城女子靑年會)에 가입하여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던 사실을 확인하고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우선, <동아일보> 1925년 3월 8일자에 등장하는 경성여자청년회 기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시내 서대문정 2정목 70번지에 있는 경성여자청년회에서는 금 8일 하오 7시 반부터 경운동 천도교기념관에서 동회의 발회식(發會式)을 거행한다는데 일반 방청을 환영한다 하며 여흥으로 무도(舞蹈)와 음악도 있다고… (<동아일보> 1925년 3월 8일자, 2면 10단.)

이어서 <동아일보> 1926년 1월 6일자에는 경성여자청년회가 집행위원회를 개최하였으며, 집행위원으로 이경길(李瓊吉), 최순복, 이경희를 선출하고 신춘강연회를 개최할 것을 결의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러면 경성여자청년회는 과연 어떤 단체인가? 경성여자청년회는 1920년대 초반에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사회주의운동가들 간에 분파(分派) 투쟁이 가열되어 여성동우회라는 독립운동 단체가 4분 5열되기에 이르자, 박원희(朴元熙)가 주축이 되어 30여 명의 여성 회원을 모집하여 1925년 봄에 발족을 보기에 이른 여성 중심의 독립운동 단체 가운데 하나였다.

이 경성여자청년회의 강령은 첫째, 부인의 독립과 자유를 확보하며 모성보호와 사회상에 대한 남녀지위평등 사회제도의 실현, 둘째, 부인해방에 관한 사회과학상의 교의(敎義)를 분명하게 하며, 그것을 널리 보급하는 것이었다. 또한, 동 여자청년회는 국제부인의 날을 철저하게 지키며, 부인강좌에도 ‘조선부인’과 ‘구라파부인’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국제사회주의운동으로서 여성운동을 의식화하기에 노력하였다. 1926년 4월 19일자로 일제 총독부당국이 작성한 ‘사상요시찰인연명부(思想要視察人聯名簿) 추가의 건’이라는 문서에 따르면, 경성여자청년회는 서울청년회, 조선여성동우회 등과 함께 요시찰인 연명부에 그 이름을 나란히 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경성여자청년회가 일제 당국으로부터 날카로운 감시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동시에, 구타원 종사가 바로 이와 같은 일제의 날카로운 감시 아래에서 경성여자청년회의 집행위원으로 활약하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여기서 구타원 종사의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인물이 바로 앞에서 소개한 구타원 종사의 약력에 등장하는 하난사(1868~1919) 선생이다. 하난사 선생은 구타원 종사가 이화학당에 재학하는 시절의 은사로서 구타원  종사에게 영어 등을 가르쳐 준 분이다. 평양 출신인 하난사 선생의 본명은 알 수 없으며 영어 이름은 낸시(Nancy)였고, 결혼 후 남편 하상기의 성을 따서 하난사라 하였다.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다가 1896년 미국 오하이오 웨슬레이안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1900년 한국 여성 최초로 문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였다. 그리고 1906년부터는 이화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여성계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애국정신이 충만하여 지각이 부족한 여학생들에게 엄한 훈계와 매서운 꾸짖음으로 여성으로서의 각성과 향학열을 촉구하였고, 1907년 진명부인회가 주최한 집회에서 최초의 여류 연사로 등단하여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연설을 하였으며, 자혜부인회에서 개최한 연설회에서는 김윤식, 유길준 등 당대의 저명 남성 지도자들과 함께 연설하기도 하였다. 1910년 신흥우와 함께 미국에서 열린 감리교 집회에 우리나라 여성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그 뒤에도 몇 차례에 걸쳐 미국으로 건너가 우리나라를 소개하는 연설을 하여 희사 받은 돈을 이화학당 시설의 현대화에 사용하였다.

이러한 하난사 선생의 국제적 활약상으로 인해 일제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고, 결국 1919년 파리평화회의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하고자 중국으로 망명하던 도중 북경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구타원 종사의 경성여자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은 이화학당 시절의 은사 하난사 선생의 애국정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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