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취한 사람은 말에서 떨어져
다치더라도 죽지 않는다 
글. 김정탁

앞 장에서 세상일을 확실히 버리면 몸이 수고롭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자신의 삶까지 잊으면 자연(天)과 하나가 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자연과 하나가 된 사람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가? 장자는 먼저 열자(列子)와 관윤(關尹)의 대화로서 이를 보여주는데 한 지인(至人)의 예를 통해서이다. 참고로 지인은 무기(無己), 즉 자기가 없는 사람이다.

이런 지인은 물속에 잠겨 수영을 해도 숨이 막히지 않고, 불을 밟아도 뜨거워할 줄 모르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것이 자연과 하나가 된 사람의 모습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건 앎이나 재주, 또는 용감함 때문이 아니라, 순수한 기(氣)를 지켜서이다. 이는 세상을 잊었기에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그러면 순수한 기를 어떻게 지켜나갈 수 있을까? 사물은 모두 나름의 얼굴과 형상, 또 소리와 색채를 지닌다. 그래서 사물들 사이에 차이가 생겨나고, 또 이 차이로 인해 우리는 사물들 중에 어느 게 우선한다는 판단을 한다. 이런 판단은 사물의 속성으로 인한 게 아니라 사물이 지닌 모양과 색깔에 의해 결정되므로 안타까울 뿐이다. 예를 들어 큰 건 작은 것보다 좋고, 빨강색은 초록색에 비해 화려하다는 식이다. 이런 식의 태도는 우리가 사물을 잊지 못해 생겨난다.

그런데 곰곰 따져보면 사물은 원래 순수한 기가 모아져 형성되므로 원래 모양이 없는 상태로 머물면서 변하는 게 없는 상황에서 만들어진다. 사물이 만들어지는 이런 이치를 터득하고서 이를 깊이 궁구한 사람이라면 사물의 모양과 색깔 따위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지인이 이와 같은 사람이다. 

그래서 지인은 불음지도(不淫之度), 즉 분수에 지나치지 않는 수준에 머물며 동시에 무단지기(無端之紀), 즉 끝없이 변화하는 사람의 도리를 몸에 지닌다. 이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분수를 지키더라도 거기에 매이지 않으면서 변화하는 사람의 도리를 따르며 유연하게 처신한다는 말이다. 이런 자세를 지니면서 지인은 만물이 끝나고 시작되는 곳에서 유유히 노닌다. 또 지인은 타고난 본성을 고르게 하고, 기를 보양하고, 덕을 모아서 만물이 만들어지는 근원과도 통한다.

그 결과 지인은 천성(天)을 온전히 지키고, 정신(神)도 빈틈이 없어 사물의 외면이 지인의 마음에 끼어들지 못한다. 그래서 지인은 물속에 잠겨 수영을 해도 숨이 막히지 않고, 불을 밟아도 뜨거워할 줄 모르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도 두려워할 줄 모른다. 모두 세상을 잊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세상을 잊는 이런 방법들을 실천에 옮기기는 정말로 어렵다. 그래서 지인이라도 실천에 쉽게 옮길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에 장자는 보통사람도 실천하기 쉬운 방법을 소개한다. 그건 술 취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일이다. 술에 취하면 세상을 쉽게 잊는다. 그래서 술 취한 사람이 마차를 타고가다 떨어지면 다치긴 해도 죽지 않는다. 뼈와 관절이 다치는 건 술 취하지 않은 사람과 같아도 그 상처의 정도는 다르다. 술로 인해 의식을 잃어 마음이 무심해져 정신이 온전해진 탓이다.

그래서 술에 몹시 취하면 수레를 탔다는 사실은 물론이고, 수레에서 떨어졌다는 사실도 모른다. 이것이 술 취한 사람이 자신의 몸을 자연에 감추는 방법이다. 그래서 삶과 죽음, 놀라움과 두려움이 그의 마음에 끼어들지 못한다. 그 결과 어떤 사물과 부딪쳐도 술 취한 사람은 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술 취한 사람도 술로 인해 이런 정신의 온전함을 얻었는데 자연으로부터 정신의 온전함을 얻으면 술 취한 사람보다 훨씬 더 좋은 상태의 정신의 온전함을 이루지 않겠는가! 성인(聖人), 즉 무명(無名)을 추구하는 사람이 자연으로부터 정신의 온전함을 얻는 사람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자연으로부터 정신의 온전함을 과연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전설상의 명검인 막야(??)와 간장(干將)이 여기에 등장한다. 막야와 간장 같은 명검은 복수하려는 사람조차 이를 부러뜨리지 못한다. 그 명검들이 너무 귀중해서가 아니라 명검이라도 스스로 그 모양과 색깔을 좀체 드러내지 않아서이다. 그래서 복수하려는 사람조차 이것들이 명검인지 눈치 채지 못해 막야와 간장이 부러져서 도중에 생명을 잃는 법이 없다.

이것도 자신의 몸을 자연에 감추는 방법에 속한다. 성인도 막야와 간장과 같은 태도로 살아가므로 스스로를 자연에 잘 감춰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 성인도 이럴진대 성인보다 못한 사람들이 부유함, 귀함, 장수, 길함과 몸의 편안함,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옷, 멋있는 색과 소리를 밝히고 있으니, 성인이 볼 때 이는 생명의 재촉을 향해 용감하게 나아갈 뿐이다.

몸뿐 아니라 마음도 자신의 모습을 자연에 잘 감출 수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길을 가다가 지붕에서 떨어진 기왓장에 머리를 다친 사람의 예가 등장한다. 이런 황당한 상황을 만난다면 화내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심한 회오리바람으로 인해 기왓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면 사나운 마음의 소유자라도 화를 거두면서 이내 온화한 표정을 짓는다. 그럼으로써 사나운 사람이 결코 아니라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기회로 이를 잘 활용한다.

이것도 사나운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자연에 잘 감추는 방법에 해당한다. 막야와 간장 같은 명검이 자신의 몸을 자연에 잘 감추고, 사나운 사람도 자신의 마음을 자연에 잘 감춘다면 천하가 태평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싸우는 등의 혼란을 없애려 한다면 성인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자연에 감추는 이런 방법을 따라야 한다.

물론 몸과 마음을 자연에 제대로 감추려면 자연을 인위적으로 열지 말고, 자연스럽게 열어야 한다. 이런 태도는 자연을 인위적으로 재단하지 않고, 자연의 결 그대로를 유지하며 들여다볼 때 가능하다. 이런 식으로 자연을 열어야 성인에게도 덕이 저절로 생겨난다. 그런데 자연을 인위적으로 열면 성인이라도 그르침이 생겨난다. 그만큼 자연을 자연스럽게 여는 일이 중요하다.

공자를 비롯한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들은 어쩌면 자연을 인위적으로 열었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도를 천하에 펼치고자 애썼지만 천하는 안정되지 못하고 오히려 혼란만 가중되었다. 그렇다고 성인은 자연적인 것만 옹호하지 않는다. 성인은 자연적인 걸 꺼리지도 않지만 인위적인 것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성인이 이런 자세를 취하므로 백성은 진실해지고, 천하는 저절로 도에 가까워질 수 있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장자서의 <달생>에 나오는 원문이다. 참고하길 바란다.

술 취한 사람이 수레에서 떨어지면 비록 다치더라도 죽지 않는다.
뼈와 관절이 다치는 건 다른 사람과 매한가지이지만 그 상처의 정도가 다른 건 술로 인해 의식을 잃어 마음이 무심해져 정신이 오히려 온전해진 탓이다. 그래서 수레를 탄 것도 떨어진 것도 알지 못해 삶과 죽음, 놀라움과 두려움 따위가 그의 마음에 끼어들지 않는다. 이 때문에 사물과 부딪쳐도 두려움이 없었다.
그가 술에 취해 이런 온전함을 얻어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그가 자연에서 온전함을 얻는다면 어떠하겠는가?

성인(聖人)은 자연에 자신의 몸을 감추고 있어 그 무엇도 그를 다치게 할 수 없다. 복수하려는 사람은 막야()나 간장(干將)과 같은 명검을 절대로 부러뜨리지 못한다. 비록 마음이 사나운 사람이라도 회오리바람으로 인해 지붕에서 저절로 떨어지는 기왓장을 원망하지 않는다. 이럼으로써 천하가 태평해진다. 
따라서 남을 공격하고 싸우는 혼란을 없애고, 사람을 마구 죽이는 형별을 없애려면 이런 길을 따라야 한다. 인위적으로 자연을 열지 말고, 자연스럽게 자연을 열어야 한다. 자연스럽게 자연을 열면 덕이 생겨나고, 인위적으로 자연을 열면 그르침이 생겨난다.  
자연적인 것을 싫어하지 말고, 인위적인 것을 소홀이 여기지 않아야 백성은 진실해짐으로써 도(道)에 가까워진다!  Ι교수·성균관대학교 소통학. smilejtk@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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