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마음'
연두 빛깔 꿈이 돋아나다
취재 노태형 편집인

창밖, 지척에 오랜 나무 한 그루 섰습니다.
겨우내 잔가지 흔들며 윙윙 울부짖더니, 어느 순간 고요해졌습니다. 몸뚱이가 점점 검어지는 게 조금은 수상하기도 했죠. 어느 날 문득 엷디엷은 연두색 잎들이 그 딱딱한 몸을 뚫고 나왔습니다. 혹여 새순들이 놀랄까, 안간힘으로 찢어지는 아픔을 참느라 몸 흔들 사이도 없었겠죠. 얼마나 기진맥진 했을까요.
며칠 만에, 연둣빛 요정들이 검은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까르르 웃습니다.
“잎새들이, 참 철없다.”
“지금이야 이들이 내 몸을 먹고 자라지만, 조금 있으면 이들이 날 먹여 살리잖아. 난 귀엽기만 한 걸.”
“매년 그 고통을 반복해야 해?”
“늘 달고 산다는 건 너무 무거워. 가을에 다 털고 나면 얼마나 홀가분한데.”
“난 아픈 건 딱 질색인데.”
“아픔 없는 삶이 어디 있겠어. 힘든 걸 견뎌야 또 새로워지지.”
“그래, 그러고 보니 봄날 연둣빛 잎들이 참 귀엽긴 하다.”
“나도 하나 물어볼게. 넌 사시사철 항상 똑같은 모습으로 그 창가에 앉아 있어?”
“사람들은 여여해서 좋다는데….”
“사람들은 참 불쌍해. 그렇게 다 안고 가면 그 세월이 무거워서 어떻게 살아?”
“…….”
“떨치지 못한다면 덜어내기라도 해. 그래야 봄이 오지. 요렇게 귀여운 새순들도 만날 수 있고.”

문득, 생각이 많아집니다. 지난번 가을에 난 뭘 했을까? 또 그 긴 겨울 동안 무얼 비우려고 했을까? 봄이 되면서 갑자기 마음이 바빠진 이유-. 결국 비워야 할 걸 제때 비우지 못해 자꾸 짐이 쌓여만 간 것이죠. 마치 현대인들의 냉장고처럼, 부스러기 같은 욕심만 차곡차곡 쌓아 새 공간이 없어져 버린 삶이 되었습니다. ‘다시 처음처럼.’ 계절은 늘 제자리로 돌아가는 법을 알고 있죠. 하지만 인간의 삶은 직선의 길을 끝없이 달리는 두 가닥 철로 위에서 방황합니다.

검게 헐벗은 산이 점점 연둣빛으로 채워집니다. 아래에서 위로, 조금씩 조금씩 자기 몸을 가리기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연둣빛 잎사귀들이 초록으로 짙게 물들기 시작하면 산은 이제 그 속으로 숨어버릴 것입니다. 자기 모습을 숨긴 채, 어떤 음모를 꾸밀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 짙푸른 산을 의심하며 조심조심하죠. ‘순수’하지 않다는 건, 곧 의심 덩어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위험하다는 경고입니다. ‘자기’를 알아가고, ‘이기’를 드러내는 순간 순수는 사라집니다.

새봄에 왜 이런 경고를…. 아직은 4월이기 때문이죠.
계절의 아픔은 4월이라고 합니다. 소태산의 고뇌도 4월을 뚫어 깨달음에 이르렀습니다. 그러기에, 알고 나니 모든 게 아팠을 겁니다. 깨쳐보니 어둡다는 걸 안 것이죠. 모르는 게 아니라, 잊어버린 걸 안타까워했겠죠.
‘마음 가운데 일호의 사심이 없으면 먹을 것이 생기는 이치가 있다.’고 했는데…. 연둣빛 새순을 보면서 그 초발심을 돌아봅니다. ‘처음 마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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