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처사시험하기’ 일화로
- 심상치 않은 시험
글. 이정재

필자는 앞서 <옥추경>에 대한 긴 여정을 더듬어왔다. 그에 대한 관심은 소태산이 대각 후 참고했던 도가(道家)계 경이란 점에 있던 것만은 아니었다. 처사시험하기 일화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옥추경과의 상관성을 살피고자 짧지 않은 여정을 돌아왔다.
산중처사 초청, 신장 불러내기, 육정육갑, 사제의 예, 한우 한 두(頭)의 사례, 수 일간의 주송 외우기 등은 다른 일화에 나오지 않는 특별함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민속학 전문용어들이다. 민속학적 그리고 민속사상적 설명이 요구되는 사안들이었다. 필자는 이에 대해 상세한 점검을 하였고, 그 배경 지식에 대한 분석도 병행하면서 옥추경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경이었던 것이다. 그간 살폈던 대강을 되돌아보면 이렇다.

먼저 처사일화의 객관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고전문학적 설명을 ‘실화, 일화, 신화의 차이점’과 ‘일화문학적 검토’라는 제목을 달고 살폈다. 세 장르의 상관성과 함께 드러나는 분명한 차이를 알아봤고, 처사일화의 일화문학적 검토를 통해 처사시험하기의 내용에 있어 그 사실과 허구를 나누어 이해해야 하는 사정을 논했다.
처사일화에 나오는 중요 용어 ‘신장’과 ‘육정육갑’의 의미에 대해서도 그 개괄적인 것을 살폈다. ‘육정육갑 신장의 실상’, ‘불교와 신장신앙’, ‘도교와 신장’에서는 각 종교에서 드러나는 신장에 대한 사상을 광범위하게 검토하였다. 이는 처사일화에 등장하는 신장부르기가 어떤 사상적 배경에 준거했던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그 중 특히 도교에 대한 부분은 간단치 않아 ‘한·중 도교와 무속의 상관성’을 더 살펴야 했다.

중국적 도교와 한국의 도교는 그 형태와 내용에 있어 큰 차이를 보여준다. 중국의 제도화된 도교와 달리 한국의 도교는 무속에 스며들어 있었기 때문에 무속을 검토해야 비로소 전모를 알 수 있는 상황임을 깊이 논했다. ‘21세기와 샤머니즘’, ‘무속, 도교, 원시반본의 함수관계’를 통해 무속의 실체와 특히 한국적 무교와 옥추경과의 상관성을 알아봤다. 그동안 오해와 편입관으로 점철된 무속에 대한 이해와, 오히려 인류문명사의 저력으로 자리했음을 설명하였다. 이어지는 논지는 한국의 옥추경을 살펴야하는 단계였다.
계속된 ‘신비의 옥추경(玉樞經)’과 ‘옥추경의 성립 배경’을 기점으로 옥추경에 대한 논의를 심화하다가, 이것이 징기스칸의 세계제국 건설 사유체계와도 무관치 않음을 더듬었다. 그런 경이 중국과 달리 한반도에서는 비경으로 채택되어 내려오면서 민간과 무당, 도꾼들에게서 소의경전으로 정착 격상되었던 점을 일일이 살폈다.

옥추경에 대한 관심은 불법연구회 소장 옥추경으로 쏠리게 되었고, 그 결과 옥추경에 대한 논의는 의외의 성과를 도출했다. 옥추경이 길룡리에서 구인 단기도의 기도문으로 활용되었고, 그 기도의 형식이 전래의 옥추경 독송기도에 근거하였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다시금 ‘처사일화’와의 상관성을 밝혀 일부 남아있는 미진함을 메우기로 한다.

필자는 소태산이 옥추경을 이 시기, 즉 처사시험기에 접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앞서 살폈던바 ‘처사’를 ‘법사’로 간주할 때 ‘처사 시험일화’는 좌경무의 굿과 상관된다. <옥추경>은 그 주요 경이었기 때문이다. 모두 반도에서 진행된 전래의 전통에 부합하는 흐름이다.
처화는 대각 후 곧바로 구인기도를 계획한다. 그리고 그 기도 주문에 이 옥추경을 활용하였다. 그렇다면 처화는 대각 이전에 이 옥추경 주문기도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자료에 의거할 때 처사일화 시기에 접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여겨진다. 그렇지 않고는 곧바로 이어졌던 구인 단기도에서의 옥추경 활용을 설명할 수 없다.

앞서 본 바대로 ‘처사시험하기’는 불교와 도교 및 여타의 민속과 무관하고, 옥추경과의 상관성을 찾아야 하는 것으로 좁혀졌다. 옥추경에 대한 장구한 논의가 필요했던 결과는 한국의 전통신앙인 무속의 독경신앙, 좀 더 구체적으로는 좌경무 신앙과의 상관성으로 좁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과연 처사시험하기와 옥추경과의 관계 그리고 구인기도와의 상관성을 원활하게 규명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는 대목이다.

처사일화에 대한 충분한 이해는 여전히 요원하다. 예사롭지 않은 용어는 ‘신장’이나 ‘육정육갑’ 등의 표현뿐만이 아니다. 산중 처사를 부친이 수소문하여 친히 초청을 하였다든지, 신장을 부르게 되면 사제의 예를 갖춘다든지, 농우 한 두(頭)를 사례한다든지, 처사가 새벽에 월담도주를 하였다든지 하는 등등은 민속에서도 특별한 경우에 해당되는 것으로, 일반적이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심상치 않은 일화 ‘처사시험하기’를 새로운 시선으로 다시 읽어보기로 한다.

 “처사(處士)를 시험(試驗)하신 일1)
또 어느 때에는 어떠한 처사 하나가 산중에 잇다는 말삼을 들으시고 곳 사람을 보내 초빙하엿더니 처사가 먼저 대종사의 부친을 뵈옵고 말하기를
‘나는 산중에서 공부하야 신통을 얻은지가 이? 오래이라. 귀하의 아드님이 만일 나를 좇아 공부를 배운다면 반다시 불가사의의 능력을 얻게 될지니, 그 공부에 착수하기로 하면 먼저 귀가에 사육하는 농우(農牛) 1두를 폐백으로 주겠느냐?’고 하엿다. (…중략…)
대종사 생각하시되 ‘이것이 반다시 사술이며 허무맹랑한 말이로다. 무슨 공부가 사람의 생사있는 곳을 다 피한다면 그 어느 곳에 쓰게 되리요’하시고 내념(內念)에 가위(可謂) 작파(作破)하셧으나 외면(外面)으로 그 처사의 청한 바를 용인(容認)하야 다시 다른 새 방 하나를 정하여 주엇더니 그 처사 또한 종야(終夜) 송주(誦呪)하되 신장이 종시 보이지 않는지라 그 처사 대단 황공(惶恐) 참괴(慙愧)하야 그날 새벽에 소태산 외출하신 틈을 타서 가만이 월장(越牆) 도주하엿다 한다.”

이 글은 정산이 1937년경 지은 <불법연구회창건사>에 실린 것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당시는 일제가 유사종교 타파에 온 힘을 기울이던 시기로, 거의 모든 종교 단체가 해체되던 때였다. 600만의 신도를 가졌다고 전해지는 증산교 계통 보천교가 무너진 시기이기도 했다. 살벌한 시기 생존을 위한 대책 마련에 불법연구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교사는 그 과정을 적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방어적 정당성을 확립하고자 썼던 것이 <창건사> 기술의 의도였다. 이런 점까지 같이 고려해 읽어야 하는 일화이기도 하다.

앞으로 다루어야 할 부분은 어떤 과정과 절차를 거쳐 처화가 옥추경을 접하게 되었나 하는 점이다. 또 단순히 경을 접했다는 사실을 넘어, 어떤 과정을 거쳐 능숙하게 활용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에 이르게 되었는가 하는 점도 주요 쟁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시금 당시의 민속지식이 어떻게 작동하였는지를 살펴야 하는 쉽지 않은 분석 과제가 남는다. Ι교수·경희대학교 민속학연구소장. hogo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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