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름은 성하(songha)
글. 황인용

무더운 7월의 여름밤, 나는 설렘과 걱정이 뒤섞인 채로 24인치 여행가방에 짐을 쑤셔 넣었다.
나는 소심했고, 남들에게 거절당하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생각이 너무 많았다. 다른 사람들이 이런 나에게 실망할까 두려워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하지만 해외봉사를 결심한 나는 도망가지 않고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첫 번째는 해외봉사 팀과 모두 한마디씩 말을 섞어보기, 두 번째는 현지인과 최대한 많은 대화 나누기, 세 번째는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나만의 목표를 세우고 나니 복잡하던 생각이 간결해지면서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캄보디아에 도착해 첫 번째로 우리가 한 일은 프놈펜 탁아소에서 아이들과 놀아주는 일이었다. 아이들은 아주 작고 수줍어했지만, 혼자서 밥을 떠먹고 옷을 벗을 수 있을 만큼 자립심이 강했다.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행동들이 대견하기도, 짠하기도 했다. 동그랗고 티끌하나 없이 맑은 눈을 마주친 순간, 나는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말씀하신 ‘하늘사람’임을 알아보고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말았다. 나의 입꼬리는 한없이 올라갔고 자세를 낮춰 눈높이를 마주치는 법도 배웠다. 아이들은 나의 어색한 손짓에도 호기심 어린 눈망울을 굴리며 따라왔다. 색색이 작은 풍선들을 만지고 던지고 끌어안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에 나는 한없이 반해버렸다. 엄마와 떨어져있는 시간이 길어 사랑이 부족하진 않을까, 어둡진 않을까라는 걱정이 무색하게 밝고 생기가 넘쳤다. 메말라 있던 나의 마음에 시원한 기쁨이 뿌려진 기분이었다.
두 번째 일정으로 바탐방교당에 도착해서야 본격적으로 캄보디아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수영장에 놀러갔다가 큰 감동을 받았다. 물장난을 치다가 올해 초 좌산 상사님께 받은 염주를 물속에 떨어뜨렸는데, 이 소식을 들은 캄보디아 친구들은 노는 것을 멈추고 모두 물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결국 염주는 나의 손목으로 돌아왔고, 작은 염주를 찾기 위해 물속으로 거침없이 들어가던 그 마음이 너무 소중했다.
나는 러어(잘했어), 어꾼(고마워) 등을 쓰며 캄보디아 친구들과 대화를 나눴고 친구들은 그런 나를 대견해하며 캄보디아 이름을 지어줬다. 내가 멋진 이름을 갖고 싶다고 하니, 친구들은 ‘성하(SONGHA)’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캄보디아 말로 ‘멋진, 잘생긴’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꽤 마음에 들었다.
한국에서는 하루에 다섯 번도 넘게 한숨을 쉬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하지만 캄보디아에서는 눈만 마주쳐도 미소를 짓게 되었다. 더구나 내가 가장 어려워하던 ‘사람들과의 관계 맺기’도 더는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 캄보디아에서의 소중한 인연들과 사랑을 나누는 법을 배울 수 있어 너무나 감사하다. 어꾼 쯔란~^^.


네 번 입원한 사나이
글. 김중천

“어? 또 오셨어요?”
나를 맞이하는 원대병원 7층 간호사님이 이제는 너무 잘 알고 있다는 듯 인사를 건넨다. 올 한해 원대병원에만 4번째 입원이니 기억을 못할 수도 없겠지만.
첫 번째 입원은 퇴근하는 길에 신호등에 서 있는 나의 차를 음주 운전자가 뒤에서 박아 추돌사고가 나면서였다. 둔탁한 충격이 와서 정신이 없는데, 사람들의 도움으로 병원에 갔고, 한 달간 입원했다.
한 달 동안 몸을 잘 추스르고, 그동안 정든(?) 간호사님과 주치의 선생님들에게 인사를 하고 퇴원을 하였는데, 그 후 정확히 한 달 반 만에 작업을 하다가 계단에서 미끄러져 다리를 다쳤다. 두 번째 입원이었다. 세 번째는 다치지 않은 다른 쪽 다리를 혹사시킨 탓에 이상이 생겨 수술하였다. 퇴원 후 이제 조심히 다닌다고 모든 보완과 격려를 받으며 있었는데, 어느 날 오른쪽 눈이 시커멓게 보였다. 안과를 가니 “여기서는 안 돼요. 큰 병원에 가세요.”라며 원대병원으로 진료를 보냈다. 네 번째 입원이었다.
허리는 교통사고로 안 좋고, 양발은 수술로 흉이 져서 덜그럭거리는 와중에 오른쪽 눈은 안대를 한 모습이라니! 네 번째 입원 소식에 가족들도 이제는 자체적 평가를 하고는 그냥 잠깐 보고 가셨다. 만삭의 정토 또한 내가 아픈 것이 얄미운지, 시댁에 반품 처리를 해야겠다고 했다. 내가 1년 이상 사용 시기가 지나서 반품불가라고 하니 마지못해 웃는다.
주위에서는 ‘잦은 입원이 걱정되지 않느냐?’고 불안해했다. 하지만 오히려 나는 “내가 몸이 안 좋아서 신호를 주고 고치라는 은혜를 받았으니, 괜찮다.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신체가 진급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전에는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원망심이 먼저 들었으나, 하나하나 꼼꼼히 치료하며 내가 다시 건강하도록 보완하는 과정이라 생각하니, 다치기 전에 일심을 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닌지 반조도 하게 되었다.
공부를 한다는 건 다른 게 아니다. 어떠한 계기가 생기고, 그 계기 속에서 내가 무슨 마음으로 진급하느냐에 따라 맺어지는 결실도 다르리라 생각한다. 사실 네번째 입원할 때는 실명할 수 있다는 소리를 듣고, 가족이 먼저 털썩 주저앉았다. 다행히 수술을 하면 시력이 좀 떨어져도 볼 수 있다는 그 말에 안정이 되었다.
네 번째 입원에서 주치의 선생님은 최소 한 달을 이야기하셨지만 앞서 3번의 입원 경험이 입증하듯, 경이로운 나의 회복력은 8일 만에 퇴원을 가능케 했다. “좌절하지 않고, 치유될 수 있다.”는 그 한마디에 힘을 얻고 최선을 다한 결과가 좋은 치료 효과로 이어지게 된 것 같다. 믿음이 큰 힘이 되어 놀라운 결실이 된다는 사실을 몸소 실천하였으니, 주변에도 전해줘야겠다.


교실의 유령
글. 송민경

담임선생님은 칠판에 내 이름을 적더니 이렇게 말했다.
“형편이 부족한 친구니까 잘해주도록 해라.”
반 아이들의 시선이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열 살이란 나이는, 가난한 친구보다 부잣집 친구와 노는 게 더 멋진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충분한 나이였다. 나는 반 아이들을 향해 의미 없는 인사를 건넸고, 전학 간 첫날, 왕따가 되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선생님을 미워하기로 했다. 선생님은 덩치가 큰 40대 후반의 남자였다. 그는 늘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며, 땀으로 번들거리는 매끈한 두피를 닦아내곤 했다. 그 모습은 꽤 안타까워 보이기도 했는데, 그를 미워하기 위해 우습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반 친구들은 특별히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괴롭힘을 당하고 있던 아이는 반에 이미 존재했기 때문에, ‘괴롭힐 애’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다고 나에게 말을 걸거나 관심을 기울이는 친구도 없었다. 나는 늘 혼자였다.
나는 나를 이렇게 만든 선생님에게 복수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의 복수는 ‘웃어주지 않기’였다. 그는 때때로 실없는 농담을 던지고, 반 아이들이 웃을 수 있게 다음 문장을 말하기까지 간격을 두었다. 가끔 재밌는 농담도 있었지만,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웃어주지 않았다는 승리감에 도취되기도 했지만, 그가 나를 보고 있긴 했는지 확신이 서지 않자 정말로 웃음기가 사라져버렸다.
학기가 끝나갔고, 여전히 나는 왕따였다. 교실 안에 유령이라도 있는 것처럼 두려웠다. 사실 유령은 나였는데 말이다. ‘문이 고장 나서 열리지 않았으면, 학교에 불이 나서 집에 갈 수 있었으면.’ 매일 기도했지만 애석하게도 문은 쉽게 열렸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교실로 들어가지 못하고 복도에서 서성이고 있던 나는, 다른 반 남학생과 부딪혔다. 그리고 실내화 걸이에 눈 주변을 찔리는 사고를 당하며 조퇴를 했다. 신이 기도를 들어준 것이었다. 사고가 있고 나서 나는 처음으로 관심을 받게 되었다. 여자아이들 몇이 괜찮냐고 물어온 것이다. 연민을 받는다는 게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걸 그때 알게 되었다.
뜻밖에도 담임선생님을 통해 그 생각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누이가 세상을 떠났다고 말하더니, 갑자기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의 울음은 어린아이의 울음처럼 대중없이 터져 나왔다. 열 살짜리 아이들에게 죽음은 너무나 먼일이었고, 우리들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선생님을 미워하지 않게 되었다. 연민과 분노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뒤였다. 새로운 학기가 다가오고 있었고, 여전히 나는 왕따였지만, 교실 문을 여는 게 전만큼 두렵지는 않았다. 교실의 유령은 더 이상 없었다.


그래서 ‘배움이’예요
글. 김덕만

“여보오~ 여보오~?”
침대에 누웠는데 아내가 부른다. 그런데 어투가 묘하게 낯설다. 혼내려는 건가? 나 잘못한 거 없는데…?
문을 열어보니 아내는 손에 작은 막대기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여보오, 이거 나만 두 줄로 보이는 거 아니죠??”
우왕, 그 순간 만감이 교차되고 어리둥절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전율이 아내를 안아주기도 전에 나를 덮쳐버렸다.
돌아보면 원기 103년, 올해는 유난히 계획도 많았고 고민 또한 많았던 시작이었다. 네 번째 십 년을 시작한 해라 감회도 남달랐지만 더 중요한 변화도 있었다. 10대, 20대에 갖춘 지식을 기반으로 30대를 무난히 보냈듯 40대 역시 물 흐르듯 지날 줄 알았지만, 문득 뭔지 모를 배움의 아쉬움이 내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일본에서의 학위밖에 없던 나는 한국 대학을 알아봤고, 결국 아내의 든든한 응원 속에 대학으로 발걸음을 옮겼던 것이다.
그런데 첫 등교하는 3월 첫 주, 와이프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우리들의 아기가 찾아왔다. 아빠 따라 학교 오가며 함께 배우고 싶어서 이제 온 걸까? 그래서 그 소중하고 감사한 마음을 담아 태명을 ‘배움이’라고 지었다. 그렇게 벌써 백구십일하고도 삼일째 나는 배움이아빠로, 아내는 배움이엄마로 살고 있다.
누구나 그렇듯 아빠가 되어가고 있다는 신비감에 매일이 행복하다. 하루하루 볼록해지는 와이프의 배를 바라보고 작은 태동을 함께 느끼며, 그저 신기해하고 또 신기해한다. 특히 밤마다 아내의 배에 대고 태담을 할 땐 그 행복이 극대화된다. 원래는 일원상 앞에서 했었는데, 배움이가 온 후로는 매일밤 오늘 하루 뭘 했는지, 어떤 느낌이었는지, 내일은 뭐 할건지 하는 태담이 곧 우리의 가정기도가 됐다.
우리와 곧 만날 배움이에게 소중한 지면을 통해 인사를 전해본다.
“배움아~ 배움이가 우리에게 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래왔듯, 아빠는 꾸준히 태담도 잘해주고 엄마에게도 사랑한다는 말 많이 많이 할게요. 엄마 뱃속에서 건강하고 튼튼하게 잘 지내고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요. 그리고 배움아, 아빠의 영원한 1번인 엄마가 가끔은 배움이에게 1번 자리를 빌려주겠지요? 그럴 때마다 세상 모든 행복 다 느끼는 소중한 시간을 선물해줄게요. 배움이도, 우리 여보도 너무너무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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