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학의 개벽을 위한 전제 (3)
- 초기교서의 ‘근대적’ 위상 -
글. 박윤철

1924년(원기 9) 6월, 전북 익산 보광사에서 개최된 불법연구회 창립총회에서는 임시규약이 채택되었다. 그 임시규약은 보완과정을 거쳐 1927년 3월에 <불법연구회규약(佛法硏究會規約)>으로 간행된다. 표지가 노란색이었기 때문에 일명 ‘노란가위 취지서’라고도 불렸다. 한편, 1926년 9월 26일에 개최된 <제 4회 평의원회(評議員會) 회의록>에 “총재 선생(소태산)께서 친히 제정하옵신 신규약(新規約) 초안을 축조(逐條) 통과한바 이의가 무하여 그 초본(草本)을 속도갱쇄(速圖更刷; 서둘러 인쇄함)하여 명년 3월 이내에 반포(頒布)하기로”1) 라고 기록된 내용으로 보아 <불법연구회규약>은 소태산의 친제(親制)라 하겠다.

주목할 것은 최초로 공간(公刊)된 초기교서가 ‘규약’의 형태로 나왔다는 점이다. 표제가 ‘경(經)’이나 ‘전(典)’이 아닌 ‘규약’으로 나온 이유는 무엇이며, ‘규약’을 과연 경전의 범주 속에 포함할 수 있을까? 바로 여기에 원불교학의 개벽을 위한 전제가 숨어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주지하듯이, 소태산 대종사는 불법연구회 창립 직후에 ‘정신개벽’에 필요한 각종 법규를 ‘○○법(法)’이라는 이름으로 속속 제정한다. 1925년(원기 10)에 정기훈련법과 상시훈련법, 유무념조사법, 일기조사법, 학력고시법, 학위등급법, 사업고시법 등을, 1926년에 신정의례와 사기념법(四紀念法)을. 1927년에 유공인대우법과 신분검사법을, 1928년에 단원 성적조사법을, 그리고 1929년(원기 14)에는 은부모시자녀결의법(恩父母侍子女結義法)을 제정하여 곧바로 시행에 들어갔다. 이처럼 소태산 교조 재세 시대인 익산시대 제 1기(1924~1943)에 제정 시행된 각종 법규 등은 익산시대 제 2기(정산 종법사 재임시대, 1943~1962)와 3기(대산 종법사 재임시대, 1962~1994)에 걸쳐 이루어지는 원불교 교서결집 과정에서 그 상당수가 수용된다.

예컨대, 1962년(원기 47) 9월에 간행된 <원불교교전>은 <정전>과 <대종경>으로 구성되어 있는바, <정전> 속에는 1925년에 제정된 상시훈련법의 ‘재가공부인 응용할 때 주의사항 6조’가 ‘상시응용주의사항 6조’로 제목만 바뀔 뿐, 제정 당시의 원형 그대로 수용되었다. 또, 그 ‘상시응용주의사항 6조’ 안에 “노는 시간이 있고 보면 경전 법규(法規) 연습하기를 주의할 것이요.”라는 조목이 있는바, 이 ‘법규 연습’ 곧 법의 훈련을 통한 질서화(秩序化)야말로 세계사적 차원에서 회자되는 근대(近代)의 표상(表象) 그 자체이다. 요약하면, 익산시대 제 1기에 제정 시행된 각종 법규는 ‘경전’과 동일한 위상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근대종교로서의 원불교’의 위상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익산시대 제 1기에는 위에서 언급한 각종 법규 외에도 다수의 초기교서들이 근대적 인쇄 기술을 활용하여 간행되었다. 1927년에 최초의 공식 초기교서 <불법연구회규약> 간행(3월)을 필두로 같은 해 5월에 <수양연구요론>이 나왔다. 1931년(원기 16) 7월에는 이른바 ‘교화단(敎化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불법연구회통치조단규약>이 간행된다. 1932년 4월에는 현행 교리의 기본골격이 제시되는 <보경 육대요령(寶經 六大要領)>이, 1935년(원기 20)에는 초기교서 가운데 ‘일원상(一圓相)’ 교리가 최초로 등장하는 <조선불교혁신론>과 원불교 의례의 기본이 담긴 <예전>이 간행된다. 이로써 원불교는 교리(보경 육대요령), 교단(불법연구회통치조단규약), 교례(예전) 등 제도종교가 갖추어야 할 요소를 두루 갖춘 종교가 된다. 1937년부터 1938년 사이에는 <불법연구회창건사>가 불법연구회 <회보>에 연재되어 교조 소태산의 일대기를 비롯한 원불교 초기 역사가 정리되기에 이르고, 1943년 봄에는 초기교서의 집대성판 <불교정전(佛敎正典)>이 마침내 간행된다. 

익산시대 제 1기에 다양한 초기교서들이 근대적 인쇄 기술을 통해 간행되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익산시대 제 1기 때부터 초기교서를 지속적으로 간행한 사실은 불법연구회가 1920년대부터 이미 근대화된 제도종교(制度宗敎)로서 그 기반을 착실하게 닦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다시 말해, 불법연구회는 공식 활동을 전개함에 따라 초기교서라는 근대적 활자 매체의 간행과 보급을 통해 회원들의 신행(信行)과 훈련(訓練)을 이끄는 근대적 종교로서의 틀을 확고하게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근대종교로서 불법연구회’는 당연히 회원들로부터 신뢰는 물론, 비회원들 사이에서도 ‘이상향’으로서 주목받기에 이르렀다. 또한 회원 수의 증가에 따라 초기교서 간행에 필요한 물적 기반 확대는 물론이려니와, 초기교서에 대한 수요 및 그 보급망도 나날이 확대되어 갔다. 

각종 법규의 제정 시행 및 초기교서의 지속적 간행으로 대표되는 익산시대 제 1기 원불교 경전발달사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분야가 있다. 바로 불법연구회 기관지의 존재이다. 최초의 기관지는 1928년 5월에 창간된 <월말통신(月末通信)>이다. 1932년 4월호까지 통권 35호가 간행된 <월말통신>은 36호부터는 제호를 <월보(月報)>로 바꾸어 1933년 6월까지 통권 48호까지 간행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허가라는 이유로 조선총독부에 의해 폐간된다. 이에 불법연구회는 총독부의 정식 허가를 얻어 1933년 9월에 <회보(會報)>를 창간했다. <회보>는 1940년 6월에 강제 폐간되기까지 통권 65호까지 간행되었다.

불법연구회 기관지는 <월말통신> 창간호부터 <회보> 65호에 이르기까지 모두 113호가 간행되었는데, 기간으로는 1928년 5월부터 1940년 6월까지 12년 3개월에 이른다. <월말통신>에서 <월보>로, <월보>에서 다시 <회보>로 표제가 바뀌면서 지속적으로 간행된 기관지 속에는 교조 소태산의 법설을 비롯하여 요언(要言)과 회설(會說), 불법연구회 회원들의 신행(信行) 관련 기록, 그리고 일제강점기 원불교의 동향을 알려주는 자료들이 풍부하게 실려 있다. 그 중에서도 소태산의 법설과 요언 등은 익산시대 제 2기에 발족한 ‘대종경 편수위원회’의 노력으로 수집, 정리되어 현행 <원불교교전>속의 <대종경>이란 이름으로 경전화 된다. 따라서 익산시대 제 1기인 불법연구회 시대에 간행된 <월말통신>등에 실린 여러 기록들은 현행 원불교경전, 특히 <원불교교전>속에 포함되어 있는 소태산의 언행록 <대종경>의 원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원불교학 연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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