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해도 이해 안 되는데…
원망 않고 자신 살펴도 꺼림칙한 이유가 뭘까… 앙금이 남아서일까?
글. 박정원  월간<산> 편집장·전 조선일보 기자

사회학에서 ‘상호주관적’이란 개념이 있다. 세상에는 ‘완전한 객관’이란 개념은 없기 때문에, 주관을 가진 대상끼리 서로 비슷한 의견으로 어느 정도 합의를 봤을 때를 상호주관적이라고 한다. 흔히 사용하는 ‘객관적’이란 말의 다른 표현이다. 다시 말해 세상에는 객관이 없다는 전제하에서 생긴 개념이다.

그런데 정말 객관이 없을까? 객관이 존재할 수가 없을까? 이를 떠올리게 하는 사건이 얼마 전 일어났다.
내 차가 리무진 버스와 부딪히는 위험천만한 교통사고가 났다. 다행히 인적 사고는 없었지만 아찔한 순간이었다. 사연은 이렇다. 출장을 다녀오던 금요일 저녁, 퇴근시간과 맞닥뜨렸다. 교통체증이 매우 심했다. 출장으로 지친 몸에 교통체증이 더해지니 더 짜증이 났다. 혼자 운전하느라 졸리기도 했다. 편도 3차선 도로의 2차선에서 대기하다가 1차선이 비어 있기에 뒤에 차가 없는 걸 확인한 후 깜빡이를 켜고 차선을 바꿨다. 그런데 달려오던 차가 가속이 조금 있었던지 순식간에 내 차 뒤로 왔다. 그 차는 클랙슨을 누르며 헤드라이트를 켜고 난리가 났다. 그냥 모른 채 갔다. 얼마 가지 않아 교차로에서 좌회전을 했다. 그 순간 뒤에 있던 그 차가 순식간에 앞으로 오더니 좌회전을 하자마자 내 차 바로 앞에 멈췄다. 나는 깜짝 놀라서 뒤따라 정차를 했다. 자칫 추돌할 뻔한 순간이었다. 화가 치밀었지만 지치기도 해서 그냥 무시하고 차선을 바꿔 가려니 앞차가 가다가 다시 멈췄다. 그래서 다시 좌회전 깜빡이를 넣고는 차선을 바꾸려 시도하는 순간, 리무진 버스가 내 차와 충돌했다. 내가 차선을 바꾸려했던 차선은 버스전용차선이라 나의 일방적 잘못이었다.

리무진 버스기사는 버스를 가변으로 빼고는 이리저리 둘러보고 사진을 찍어 전송하고 여기저기 전화를 하더니 단도직입적으로 “10만 원만 주면 나는 그냥 가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앞에 정차했던 그 차를 보복운전으로 신고하라.”며 “그러면 증언은 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돈을 주면서 “나중에 전화를 할 테니 증언을 해 달라.”고 말했다. 그 기사는 “그러겠다.”고 했다.
바로 교통사고 신고접수를 했다. 동시에 보험처리도 했다. 경찰서에 가서 진술서도 썼다. 그런데 담당 경관의 말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뭔가 사연이 있는 듯했다. 찜찜했지만 내색을 하지 않았다. 담당 경관은 나에게 “보복운전은 과태료에서부터 입건까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지만 큰 사건이 아니면 대개 과태료 부과 대상이다.”고 했다. 나도 그 정도면 내 차 앞에서 정차를 했던 상대방 그 기사에게 경고 정도는 충분히 되리라 보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경찰 출입하는 회사 후배에게 어떻게 진행되는지 체크해보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그 후배는 “앞에 정차했던 그 차는 과태료 대상도 안 되고, 선배가 일방적으로 잘못한 걸로 판단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확보한 영상을 너네들이 한 번 봐라. 그 영상을 객관적으로 보고 내가 100% 잘못했다고 판단되면 내가 그냥 수긍할게.”라고 후배들에게 말했다. 당한 내 입장에서는 도저히 내 과실 100%가 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며칠 뒤 담당 경관은 상대방 기사를 불러 진술서를 받고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그 기사와 통화할 수 있냐?”고 물었다. “상관없다.”며 통화를 했다. 그 기사는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냐?”고 물었다. 난 “어떻게 할 필요 없고, 그냥 보험에 맡기면 된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전혀 예상 밖의 결과가 나왔다. 상대방 보복운전으로 나의 충돌사고가 발생했는데, 그 담당 경관은 나의 일방적 과실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어이가 없어 담당 경관과 통화를 하며 “보복이 무슨 개념인지 아느냐?”고 따져 물었다. 경관은 머뭇머뭇하더니 조금 대화를 하다 귀찮은 듯 “전화를 끊겠다.”며 통화를 끝냈다.
내가 차선을 바꾼 데 대한 보복으로 진행하는 내 차 앞에 일방적으로 상대방 차가 정차해서 피해가다 사고가 났는데 피한 내가 일방적 과실이라고 하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맹자> 이루편에 ‘남을 예우해도 답례가 없으면 자기의 공경하는 태도를 돌아보고, 남을 사랑해도 친해지지 않으면 자기의 인자함을 돌아보고, 남을 다스려도 다스려 지지 않으면 자기의 지혜를 돌아보라’는 말이 나온다. 남 탓이 아니라 자기 탓으로 돌리며, 자기중심의 시각이 아니라 상대의 시각에서 헤아려 보라고 고대부터 가르침이 내려온다.
내가 그 상황을 아무리 돌아보고 상대방의 입장이 돼 봐도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는다. 나의 아량과 이해 부족 탓 일까.

세상에는 내 생각과 같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의 일방적 잘못이 과연 있었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상대방 그 기사를 탓하기 전에 먼저 끼어든 나 자신을 돌아봐도 나는 사고를 유발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의로 끼어들지도 않았다. 의사표시를 명확히 했다. 그런데 상대 기사는 순식간에 갑자기 내 앞에 멈췄다. 나는 피하려다 사고가 났다. 그런데 나의 일방적 과실이라고 한다.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의 객관성, 아니 상호주관성이 부족해서일까. <정전> ‘솔성요론’ 9조에도 ‘무슨 일이든지 잘못된 일이 있고 보면 남을 원망하지 말고 자기를 살필 것이요’라고 했다. 나를 살피는 데도 힐링이 안 되고 계속 꺼림칙하게 남는 건 무엇 때문일까. 나의 뭐가 부족해서일까?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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