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금연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법신불 사은이시여, 저의 아버님을 지켜 주신다면
저도 포기하기 어려운 한 가지를 버리겠습니다.”
글. 문명재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 졸린 눈을 비비며 거울 앞에 섰다. 고개를 들어보니 내 앞엔 내가 아닌 아버지가 계셨다. 희끗한 머리와 눈가의 자글자글한 주름이 많이도 닮았다. 나도 모르게 그리운 그 이름을 가만히 불러본다. 아버지… 눈물이 핑 돌았다.
아버지를 잊고 살다가 나이를 먹어가는 내 안에 아버지가 계신 것을 느끼면서 많은 추억이 떠오른다. 나의 금연도 아버지와의 소중한 추억들 중 하나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담배를 희한하게 배우고 희한한 방법으로 끊었다. 군 복무 시절의 일이다. 어느 날 내무반에서 회식을 하는데, 대부분의 대원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담배를 못 배웠지만 우습게 보이기 싫어서 한 대 빼어 물고 불을 붙였다. 하지만 그저 입 안에 머금었다 내뱉는 식이었다. 나름대로 흉내를 잘 내고 있다고 생각하며 멋을 부리고 있는데, 갑자기 눈에서 불이 번쩍 났다. “짜식, 담배도 못 피는 놈이 아까운 담배만 죽이고 있어.” 하면서 고참이 뒤통수를 한 대 내려친 것이다. 그의 주먹보다, 들키고 싶지 않은 모습을 들킨 부끄러움이 나를 더 아프게 했다.

그날 저녁 나는 담배 두 갑을 챙겨서 화장실로 갔다. 남들처럼 멋지게 피우는 모습을, 고참 앞에서 당당하게 담배를 빼무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한 대 한 대 태워 없앴다. 가져온 담배가 몇 개비 안 남았을 때 드디어 깊숙이 들이마실 수 있게 되었다. 머리는 핑 돌았지만 뿌듯했다. 그 후 회식자리에서 나는 일부러 그 고참 앞에 앉았다. 그리고 멋지게 담배를 물고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가 긴 연기를 내뿜었다. 그런데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는 이미 나의 뒤통수 친 일을 잊고 있었다. 허무했다. 그리고 나에게 남겨진 것은 10여 년에 걸친 흡연 인생이었다.

이렇게 희한하게 배운 담배를 결혼과 동시에 끊어보려고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 했다. 그 후 일본유학을 가게 되었고, 다시 금연을 시도했지만 이삼일을 넘기기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서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아버지께서 당뇨로 쓰러져서 입원하셨다는 것이다. 위독하시다는 얘기를 듣고 나니 모든 것을 접고 귀국해야 할 것 같았다. 며칠 상황을 보고 결정하라는 어머니 말씀에 따르기로 한 채, 나는 나도 모르게 사은님을 찾았다. 그리고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법신불 사은이시여, 저의 아버님을 지켜 주신다면 저도 포기하기 어려운 한 가지를 버리겠습니다. 이 시간 이후 담배를 버릴 테니 아버지를 지켜 주시옵소서.” 이 약속 덕택이었는지 아버지의 병세는 조금씩 호전되었다. 나는 사은님께 감사하며 금연 약속을 철저히 지켰다. 내가 아닌 소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걸고 한 약속이라 지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탤런트 김혜자 씨도 엄마의 금연을 바라는 딸의 기도 때문에 담배를 끊게 되었다고 들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금연이란 선물을 주고 가셨다. 그리고 많은 소중한 추억들과 함께 내 가슴에 살아 계신다. 그 아버지를 나는 닮아가고 있다.


붕어빵 아주머니의 미소
아주머니는 퉁퉁 부은 내 눈을 보며 “얼마나 놀랐을까.”라는
위로의 말도 덧붙여주셨다.
글. 성소희

식당을 나서기 전, 빈 그릇 가득한 테이블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내 물건을 챙기는 것은 물론이고 나와 식사를 한 상대가 물건을 두고 나가지는 않았는지, 쓱 둘러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휴대전화나 지갑, 그날 쇼핑한 물건을 두고 나가는 친구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이 친구들을 골려주는데 재미를 붙였다. 친구가 놓고 간 물건을 내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다가, 친구가 사색이 되어 잃어버린 물건을 찾을 때 의기양양하게 물건을 건네주는 것이다. “잘 좀 챙겨!”라는 따듯한 타박은 덤이다.

이렇듯 내가 친구들의 ‘분실물 센터’로 자리매김하게 된 데는 엄마의 특훈이 큰 몫을 했다. 그 특훈의 첫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엄마가 물었다.
“학원비는 잘 내고 왔어?”

엄마에게 학원비를 받은 기억은 있지만, 학원에 가서 학원비를 낸 기억은 없었다. 엄마의 말을 듣자마자 책가방을 열어젖혔지만, 학원비는 들어있지 않았다. 겁이 났던 나는 눈물부터 주르륵 흘렸다. 어쩔 줄 모르는 내 얼굴을 보고 엄마가 말했다.
“일단, 최선을 다해 찾아보자.”

엄마의 말이 맞다. 학원비를 잃어버린 슬픔에 못 이겨 엉엉 울고 있다고 해서 없어진 학원비가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학원에 다시 들러보고, 지났던 길을 되돌아갔다. 마지막으로 돌아간 곳은 학교 앞이었는데, 불현듯 교문 앞에서 붕어빵을 사 먹었던 기억이 스쳤다.
설마, 하며 붕어빵을 팔던 아주머니에게 달려갔다. 아주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 퉁퉁 부은 내 눈을 보며 “얼마나 놀랐을까.”라는 위로의 말도 덧붙여주셨다. 하굣길에 종종 붕어빵을 사 먹던 나는, 그날도 붕어빵을 지나치지 못하고 그곳에 들렀던 것이다. 엄마와 나는 아주머니에게 거듭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붕어빵 한 봉지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 식사시간엔 역시나 나의 ‘학원비 분실사건’이 이야깃거리에 올랐다.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는 네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샅샅이 찾으라고 엄마는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예방하는 것이 최고라며, 늘 확인하는 습관을 기르라는 말도 빼먹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나를 보며 활짝 웃던 붕어빵 아주머니의 얼굴을 지울 수 없었다. 그때 아주머니의 웃음과 함께 밀려오는 안도감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종종 친구들의 물건을 챙겨줄 때면, 아직도 붕어빵 아주머니의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 아주머니의 미소를 흉내 내보며, 그때 느꼈던 감사함을 잊지 않고 싶다.


조건보다 ‘사람 하나’
20대 때 결혼의 조건에는 욕심과 소유욕이 들어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음공부를 통해
사람이 가장 큰 보배’라는 것을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글. 김가은

‘서로 다르지만, 함께할 수 있는 것은 각자가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소중한 가치를 서로 알아보는 행운도 함께 했습니다.’

예민하고 까칠하지만 꼼꼼하고 계획적인 여자와, 착하고 배려심이 많지만 우유부단하고 결정장애가 있는 남자의 연애. 서로 상극이라 연애의 과정이 쉽지 않았겠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여자는 하고 싶은 것을 눈치 보지 않고 다 할 수 있어서 즐겁고 행복한 연애였고, 남자는 이것저것 결정하지 않아도 되니 마음의 부담 없이 재미있고 행복한 연애를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2년이라는 연애 기간 동안 의견 충돌, 다툼이나 서로에 대한 오해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주변 친구들이 “너네 커플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가은(법명: 예은)이가 원불교 다니면서 마음공부해서 그래? 나도 거기 다녀보면 다 이해되고 그럴 수 있어?”라고 이야기 할 정도로 저희의 연애는 굴곡이 없는 직선이었습니다.

사실 예민하고 까칠하지만 꼼꼼하고 계획적인 여자는 2014년에 처음으로 원불교 마음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마음공부를 통해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는 훈련을 많이 했고, 이것이 일상생활에서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지요. 그래서 연애 시절에도 시간이 허락될 때마다 지금의 남편과 함께 청년 법회에 참석하여 마음공부하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시간들을 종종 가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3월, 연애의 결실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많은 커플들이 결혼준비 과정에서 다툼을 하며, 파혼을 하기도 한다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위기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그 어떤 어려움도 함께 이겨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서로에 대한 배려심이 가장 빛을 발한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20대 때 제가 생각했던 결혼의 조건에는 남자의 직장, 큰 평수의 아파트, 예물, 예단, 혼수 등등 많고 많은 것에 대한 욕심과 소유욕이 들어있었습니다. 하지만 원불교를 통해 마음공부를 시작했고, 마음공부를 통해 ‘사람이 가장 큰 보배’라는 것을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지금 신랑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이유도 역시 직장, 돈, 명예 등의 어떤 조건이 아닌 ‘사람 하나’입니다. 2년이라는 연애 기간 동안 변함없이 사랑해주고 이해해주며 배려하던 이 남자의 모습에 ‘이 사람과 산다면 정말 나는 마음 편안하게 살 수 있겠다.’는 결심이 섰던 것이지요.
결혼 100일 차 신혼부부는 오늘도 <대산종사법어>에 실린 ‘부부의 도’ 법문을 마음에 새기며 서로를 믿고, 공경하며 ‘알뜰살뜰! 알콩달콩!’ 깨가 쏟아지게 지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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