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기사와의 인연
글. 박성철

지난 10여 일 동안 세 번의 택배를 받았다.
첫 번째는, “제주도에서 생산되는 콜라비가 웬만한 과일보다 맛있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전화로 주문한 콜라비였다. 통화 당시 15kg 한 박스가 3만 원이라며 입금을 하면 바로 배송하겠다고 했다. 입금 2일 후, 택배기사로부터 ‘주문한 택배가 11시쯤 도착 예정’이라는 문자가 왔다. 그리곤 10여 분 후에 다시 문자가 왔다. 자동차 수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경비실에 놓고 간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지 뭐.” 하곤 경비실에 갔다. 경비아저씨는 투덜거렸다. 직접 배달하라고 했는데도 무거워서 그랬는지 자동차 고치러 가야 한다며 막무가내로 놓고 가버렸단다.

콜라비 박스를 들고 올라와 박스를 열어 보았다. 어른 주먹 두 개를 합한 것보다 더 큰 자줏빛 콜라비 20여 개가 들어 있었다. 즉석에서 아내와 같이 깎아 먹어 보았다. 달콤함과 시원함, 사각거리는 식감이 입을 즐겁게 하기에 충분했다. 박스에는 10개씩 두 층으로 들어있었는데, 뒤적여 아래에 있는 것을 빼보니 굵기나 싱싱함이 위에 것과 똑같았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속박기를 하랴 생각했지만, 오랜 선입견으로 내 손은 벌써 ‘위아래가 다르지 않을까?’ 하며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비실에서 들고 오는 수고쯤은 품질 좋은 신용거래에 말끔히 사라졌다.

두 번째는,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휴대전화가 울리기에 받으려는데 신호가 두 번 오더니 끊겨버렸다. 쓸데없는 전화겠지 생각하고 재발신을 하지 않았다. 1분쯤 지나니 문자가 왔다. 부재중이라서 택배를 경비실에 놓고 간다는 문자였다. 지난번에는 별 의심 없이 자동차 수리가 급했나보다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조금 전에 왔던 부재중 전화번호를 다시 보니 택배 문자 전화번호와 같은 번호였다. 경비실로 내려가 택배물건을 가져오면서 경비아저씨에게 물어보았다. 경비아저씨는 택배기사가 지난번이나 이번에도 받을 사람이 부재중이라면서 경비실에 놓고 갔다고 했다. 택배아저씨가 혹시 양치기 소년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배달을 쉽게 하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그런 것은 아닌지 항의하기 위해서 전화 재발송을 눌렀다. 받을 리가 없다. 회사로 전화를 걸어서 불이익을 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다가 평상시 공부했던 인과(因果)가 떠올랐다. 이것도 택배로 맺어진 인연인데 선(善)의 인연으로 맺어야겠구나 생각하고 문자를 보냈다. “배달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그런데 오늘 외출했다가 집에 오니 문 앞에 택배가 도착되어 있었다. 아내가 무선 청소기를 주문했는데 택배기사에게 전화가 왔었단다. 아내는 “집에 아무도 없으니 경비실에 놓고 가라고 했는데 어찌 택배가 집 앞에 있느냐?”고 나에게 반문했다. 택배기사에게 어찌된 일이냐고 전화를 했다. 감사하다는 문자를 받고 미안한 생각이 들어 집 앞까지 배달했다고 했다.
우리 주변엔 수많은 택배회사가 있다. 제주도에서 보내고, 서울 아들이 보내고, 청소기 판매점에서 보내니 택배회사가 각각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연거푸 세 번을 같은 택배회사, 그것도 같은 사람이 배달한 것을 보면 인연도 특별한 인연인 성싶다. 불가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전생에 인연이 있다 하지 않았던가. 그런 특별한 인연을 싫은 소리 하여 악연(惡緣)으로 맺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주는 것이 곧 받는 것이요, 받는 것이 곧 주는 것’이 우주만유의 이치고 인과보응의 원리다. 작은 것을 베풀었는데 큰 것이 되어 돌아오기도 하고, 작은 해독을 주었는데 큰 해독이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가는 것이 방망이면 오는 것은 홍두깨라는 우리네 속담도 결국 인과의 원리가 아니던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은 물론이고 마음속에 담는 것까지 인과 아닌 게 없음을 택배에서도 배울 수 있어 감사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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