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본원자리를 찾아서
인간은 지극히 감정적… 이성에 도달하는 방법 가르치는 게 종교 아닐까?
글. 박정원  월간<산> 편집장·전 조선일보 기자

얼마 전 산림관련 단체에서 강연을 했다. 귀산촌 프로그램 일환으로 인문학에 대한 요청이었다. 다른 내용은 전부 귀산촌과 관련, 귀산촌해서 어떻게 살고 무엇을 할 것인가 등에 대한 부분이었다. 난 그런 부분을 전혀 알지 못한다. 물론 요청하신 분도 그 정도는 감안했을 것이다. 그저 이 프로그램을 더욱 알차게 할 내용을 담아달라고 했다. “마침 얼마 전 산신(山神) 관련 책을 냈으니 그에 관해서 얘기하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좋다.”는 답변이 왔다.

산신 관련 강의준비를 나름 정리했다. 원래 2시간용으로 몇 번 강의하면서 만들어놓은 내용을 이것저것 빼고 보태면서 다시 수정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혹시 수강생들 중에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가급적 신과 관련된 부분은 언급하지 말자.’고.
역시 수강생들은 전부 귀산촌을 꿈꾸는 사람들이었다. 정부에서 지원을 받아 산림 관련 단체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요즘은 귀농·귀촌 인구가 늘면서 귀산촌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증가하고 있다.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도시 생활에 대한 환멸과 권태는 누구나 느끼고 있는 듯했다.

이들에게 도움 되는 어떤 내용을 전달할까 고민했다. 귀산촌을 하면서 다들 각자의 지리적 조건에 맞게 임산물을 생산할 것이다. 막무가내, 되는 대로 생산하는 것보다 그 산에, 혹은 그 지역에 맞는 전설이나 설화에 맞는 내용을 찾아 생산물에 스토리를 접합시키면 소비자들에게 더 빨리 인식되지 않을까 싶었다. 이른바 스토리텔링이다. 스토리텔링에 대한 하나의 주제로 산신을 정하고, 이에 대해 어떻게 스토리텔링 할 것인가를 얘기하기로 했다.
하지만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기독교도에게는 이조차 무리구나 하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강의가 시작됐다.

“우리나라 산에는 어디에나 산신이 있다. 등산하는 사람들은 매년 초 기독교도나 비기독교도나 상관없이 산에서 산신제를 지낸다. 산신제를 왜 지내느냐? 그 산의 주인에 대한 인사다. 그리고 한 해 동안 무사하고 건강하게 등산 잘 다니고, 나아가 하는 모든 일이 다 만사형통하게 해 달라고 지낸다. 고대에는 동서양 모두 다신(多神)이었다. 서양에서 기독교 초기에 다신교 때문에 매우 고심한 걸로 알고 있다. 그리고 다신교를 없애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 십자군 전쟁뿐만 아니라 전쟁의 상당 부분도 종교 때문에 특히 다신과 일신과의 싸움이었다. 혹은 일신과 일신과의 싸움이었다. 신의 기원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자. 동양의 신은 번개와 제단에서 유래했고, 서양의 신은 고대 산스크리트어인 ‘불러내다’의 의미를 가진 ghuts에서 유래했다. 불러내는 다양한 대상이 있었고, 그 대상은 자연신이었다. 신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원래 다신이었다. 고대에는 문명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자연신이었다.
번개나 천둥, 나무나 동물 등 자연에 있는 대부분이 모두 인간의 숭배대상이었다. 서양 기독교가 동양에 발을 붙이지 못하는 이유는 동양에서는 아직 상당 부분 다신교를 믿기 때문이다. …….”
그 순간 어느 한 사람이 여태 참았다는 표정이 담긴 일그러진 얼굴로 거의 시비조 질문을 했다. “그게 어느 책에 나오는 내용이냐?”고. 일순 당황스럽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별 내색 없이 “웹스터 영어사전에 나오는 어원의 유래”라고 설명했다. 그 질문자는 못 미더운 듯 내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 주변에 앉은 두 사람은 굳이 의자를 밀치는 소리를 내면서 자리를 나갔다. 강의는 계속 됐다.

“우리가 곰곰이 한 번 생각해보자. 신은 왜 존재하는가? 신도 결국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닌가? 만약 인간이 없다면 신이 존재하겠는가. 따라서 인간이 있어야 신도 존재한다. ……”
여기서 아까 질문한 사람의 바로 옆 사람이 다시 강의를 끊고 말했다. 인상을 험악하게 쓰면서 시비조로 “그런 말 말고 스토리텔링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얘기를 계속 해 달라. 그렇지 않으면 안 듣겠다.”고. 한편으론 화가 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내가 수준을 잘못 맞췄나.’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강의를 대충 마무리 하고 40분가량으로 끝냈다.

돌아오는 내내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신은 정말 어떤 존재인가?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 아닌가? 인간이 없다면 신도 없는 것 아닐까? 인간이 없는데 신이 존재할 수 있을까? 신은 인간이 만든 게 아닐까? 유일신은 도대체 어떤 형태인가? 왜 다신,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할까? 나아가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왜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까? …….’

결국 인간의 편협한 가치와 옹졸함으로 신이라는 존재를 만들지는 않았을까.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인간은 이성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지극히 감정적인 동물이다. 가만히 돌아보니, 인간의 모든 결정은 감정적으로 내려지는 듯하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감정이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보면 ‘종교’는 지극히 감정적이다. 감정으로 인간을 조정하면서 성장하는 게 종교라고 하면 무리일까? 원불교는 마음의 본원자리를 찾아가자고 하는 종교다. 그 자리는 감정과 이성이 없는, 아니 어쩌면 지극히 이성적인 자리이지 않을까 싶다. ‘종교는 감정적 색채를 띠면서 이성에 도달하는 방법을 가르친다.’고 하면 무리가 있을까? 그 자리가 바로 부처님이 말씀한 깨달은 자리 아닐까? 마음의 본원자리를 찾는 공부를 꼭 해야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다진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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