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닦는 그림
현림 정승섭 화백
취재. 김아영 기자

눈 덮인 소나무와 기와집 그리고 강과 산.
설경은 주위의 소리마저 잠재우고, 모든 이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그림은 그리는 이의 생각과 마음을 담는 것”이라 말하는 한국화의 거목 현림 정승섭 화백. 그의 작품이 그와 닮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60년 동안 한국화 외길을 걸어온 정 화백. 그에게는 ‘보는 이에게 한적한 즐거움을 선사하는 작품’ ‘도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구도자’라는 말들이 따른다. 60년 세월 동안 그가 보여준 작품세계이기도 한 것이다.

“제가 만약 200년 동안 그림을 그린다면, 100년 전 그림과 100년 후 그림에 큰 차이가 없을 거예요. 단 그윽함이 깊어졌을 테지요.” 신작은 새로워지는 게 아니라 옛것에 깊이를 더해 진일보하는 것이라는 그. 전주의 풍경을 담은 작품에는 ‘82년도에 그리기 시작해 2018년 4월까지 그렸다.’라는 글귀가 함께 담겼다. 세월에 따라 풍경은 변해도 풍경 속 기운은 변하지 않듯, 한 획 한 획 반복하며 그림 속에 기운을 더하는 것이다. 그가 “사람의 겉모습은 변하지만 본 마음은 그대로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기운을 그림에 담아야 한다.”고 말한다.

“예전부터 그랬어요. 이렇게 그려봐야지, 저렇게 그려봐야지란 생각이 없었지요. 20대 때에는 인물화를 그렸고, 30대부터는 산수화를 그렸어요. 자연스럽게 전환된 거죠.” 소나무 가지 하나, 이파리 하나에 기운을 몰아 그리고 싶었다는 그. 그에게 창작이란 “‘오늘은 이렇게 숨 쉬어 봐야지.’라고 말하지 않듯, 자연스럽게 숨 쉬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모습은 종교적인 느낌과도 닮아있는데…. 거기에는 서울대 회화과 시절 심취한 동양철학과 종교가 바탕 되었다.

“산사의 고승들을 찾아 나눈 화두들을 그림에 담아 성숙시켜 나갔어요. 마이산에 심취해 여러 번 그림을 그리러 다닐 때는 스님과 생활을 같이 하기도 했지요.” 특히 서른다섯 살에는 5년에 걸쳐 ‘소태산 대종사 십상도’를 완성했다. 눈에 보이는 현실 풍경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마음으로 본 풍경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십상도’는 30년 후인 2011년에 다시 그려 완성했어요. 예전에 그린 것이 못마땅해서가 아니었죠. 그 당시의 내가 ‘대종사님의 모습이 이랬을 것이다.’고 생각해서 그린 것이니, 지금의 심정으로 그리고 싶었던 거죠. 그림은 끝없이 변하는 거예요.”

‘그림은 자기수행과 인고의 반복’이란 그의 말처럼, 70세에 다시 그린 십상도는 더욱 깊어진 그처럼 농익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젊었을 때 그림과 지금의 그림의 차이라면 ‘좀 더 나답게 되어갔다, 생각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갔다.’는 거죠. 앞으로의 목표도 좀 더 나다운 그림을 그리는 거고요.”  

60년 동안 붓을 쉰 적이 없는 그. 지난달 18번째 개인전에서는 500호에 달하는 대형작품 등 신작 40여 점을 선보였다. 하지만 그는 아직 전성기가 오지 않은 과도기라고 생각한다. 대학 시절부터 국전에 연달아 입선한 수상경력도, 수많은 전시와 교수로서의 명예도 세상 사람들의 칭찬일 뿐이라는 것. “칭찬 받기 위해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림이 좀 더 나다워 지는 것이 좋아서 그렸으니까요.” 앞으로의 10년이 인생 최고의 전성기일 것이라는 그는 오늘도 조금씩 나아짐을 느낀단다.
“내일도 눈을 뜨면 또 그림을 그릴 거예요. 그게 내 인생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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