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사의 모습을 옛날의
진인(眞人)에서 찾을 수 있다 
글. 김정탁

대종사처럼 참된 앎을 터득한 스승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보일까?
장자는 옛날에 이런 진인이 있었다는 식으로 사례를 들어 대종사를 설명한다. 이는 진인의 이상형을 통해 관념적으로 설명하는 것과 다른 방식이다. 이것도 장자가 이론보다 실천을 중시한 예라 보아진다. 첫째, 하는 일과 관련 지을 때 진인은 일이 이지러져 훼손되더라도 크게 상관하지 않고, 또 이루어져 완성되더라도 뽐내질 않는다. 그러니 일을 잘 하겠다고 기획하는 등 처음부터 일을 꾸미지 않는다. 대신 일이 되어가는 대로 그냥 놔둘 뿐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일이 잘못되어도 후회하지 않을뿐더러 잘 되어도 우쭐거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이 이지러져 훼손되는 것과 이루어져 완성되는 것의 구분이 그의 마음에서는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제물론>에선 “이지러져 훼손되는 것과 이루어져 완성되는 게 서로 구분되는 건 옛날에 전설적인 연주자 소문이 거문고를 뜯어서이고, 구분되지 않는 건 소문이 거문고를 뜯지 않아서이다.”1)라고 말한다. 이는 소문이 거문고를 연주했기에 완성된 연주와 훼손된 연주의 구분이 생겨났다는 말이다. 훌륭한 연주자였던 소문이 왜 이런 평가를 받을까? 그는 남과 다른 연주법을 좋아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바를 일부로 드러내려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드러낼 수 없는 경지까지 드러냄으로써 그만 자연의 결, 즉 천예(天倪)를 깨뜨렸다. 그래서 장자는 성인(聖人)이 되려는 사람은 활의지요(滑疑之耀), 즉 자연의 결을 교묘히 무너뜨리는 번드레한 빛남을 다스려야 한다고 말한다. 진인도 성인처럼 이게 옳다는 식으로 자신의 판단을 내세우지 않고 평상시 한결같은 상태에 머물러야 하는데, 이것이 자연스런 밝음(明)에 비추어 보는 거다.

또 옛날의 진인은 높은 곳에 올라가도 두려워하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뜨거워하지 않는다. 여기서 높은 곳에 올라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내용은 이해가 가지만,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뜨거워하지 않는다는 내용은 그 이해가 좀 난감하다. 이에 대한 해석의 실마리는 외편 <달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달생>에서  “지인(至人)은 물속에 잠겨 수영을 해도 숨이 막히지 않고, 불을 밟아도 뜨거워하지 않으며, 높은 곳에 올라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가르쳐 주세요?”2)라고 묻자 “자연스런 천성이 온전히 지켜지면서 정신도 빈틈이 없으니 만물이 어찌 저절로 끼어들 수 있겠는가!”3)라고 답한다. 이 문답에 미루어 볼 때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뜨거워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좀 과장되긴 해도 자연스러움을 유지하면서 정신을 빈틈없이 지키는 걸 강조하기 위해 동원된 표현이라고 보아진다.

둘째, 옛날의 진인은 잠들면 꿈꾸지 않고, 깨어나면 근심하지 않고, 먹는 걸 맛있어 하지 않고, 숨 쉬는 건 깊고 또 깊다. 옛날의 진인은 어째서 잠들면 꿈꾸지 않고, 깨어나면 근심하지 않을까? 이에 대해선 이미 <제물론>에서 언급한 바 있다. 제물론에선 “보통사람들은 잠들었을 때 혼들이 뒤섞여 꿈을 꾸고, 또 깨어 있을 때는 몸의 감각이 열려 사물과 접촉한다.”4)고 말한다. 그러니 진인이 잠들었을 때는 혼들이 뒤섞이지 않아 꿈을 꾸지 않고, 또 깨어 있을 때는 오관이 열리더라도 사물을 이것/저것으로, 또는 옮음/그름으로 판단하지 않아 근심할 일이 별로 없다.

또 옛날의 진인이 먹는 걸 맛있어하지 않는다는 건 미각이 둔하므로 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예민한 미각을 자랑하거나, 또 예민한 미각을 자극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어디 미각뿐인가?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등 모든 감각기관을 예민하게 만드는 추세이다. 그러니 오늘날 사람들은 진인의 모습과는 점점 멀어진다. 또 옛날의 진인은 숨 쉬는 게 깊고 또 깊었다. 그래서 숨을 들이키면 발뒤꿈치까지 깊은 호흡이 이루어졌다. 이에 반해 보통사람은 목구멍으로 얕은 숨을 쉰다. 게다가 사물에 집착하는 사람은 목이 막혀 말을 토하듯 하고, 욕심이 많은 사람은 천기(天機), 즉 타고난 틀이 천박하다. 어린아이가 막 태어나면 숨을 깊이 들이쉬는 복식호흡을 한다. 그러니 복식호흡이 자연의 결에 따른 호흡임이 분명하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호흡이 점차 얕아지면서 죽을 때는 가장 얕은 곳인 목에서 호흡이 딸각하고 끊어진다.   

셋째, 옛날의 진인은 사는 걸 기뻐할 줄 모르고, 죽는 걸 싫어할 줄 모른다. 그래서 이 세상에 나온 걸 크게 기뻐하지 않고, 또 다른 세상에 들어가는 것도 굳이 마다하지 않는다. 그저 홀가분하게 이 세상에 왔다가 홀가분하게 떠날 뿐이다. 그래서 태어난 때를 잊지 않고, 죽을 때를 구걸하지 않는다. 이처럼 생명을 받아 태어나선 즐겁게 살다가, 때가 되면 그 즐거움을 잊고서 원래의 없었던 상태로 되돌아간다. <양생주>에 “스승은 적당할 때를 맞추어 태어나고, 가야 할 때 순리에 따라 간다. 와야 할 때를 편히 받아들이고, 가야 할 순리에 편히 머물면 슬픔과 즐거움이 끼어들 수 없다.”5)는 구절이 있다. 옛사람들은 이것을  ‘하느님에 의해 거꾸로 매달렸던 속박에서 풀려남’이라고 말하는데, 장자는 이를 ‘마음으로 도를 손상하지 않고, 또 자연의 원리를 인간세상의 이치로 파악하지 않는 결과’라고 말한다.

이런 옛날의 진인은 마음에 흐트러짐이 없고, 모습은 조용하고, 이마에선 여유가 풍긴다. 그만큼 모습이 유유자적하며 편안하다. 또 호젓함과 따스함이라는 상반된 모습을 모두 지닌다. 호젓한 모습에서 가을처럼 맑고 청명한 느낌을 받으며, 따스한 모습에서 봄과 같은 온기가 느껴짐을 뜻한다. 또 기쁨과 화냄이 생기더라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처럼 자연스러워 상대방이 그걸 의식하지 못한다. 또 만물과 잘 어울려서 그 끝을 모른다. 즉 마주하는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더라도 이를 무심히 따르면서 거역하지 않는다. 따라서 슬퍼도 좀체 슬퍼하지 않고, 기뻐도 좀체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니 <제물론>에서 언급된 바 있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 려탄변집(慮嘆變慹)의 생각, 요일계태(姚佚啓態)의 행동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여기서 희로애락은 기쁨·노여움·슬픔·즐거움이란 감정을, 려탄변집은 걱정·한탄·변덕·고집이란 생각을, 요일계태는 아첨·방자·솔직·꾸밈이란 행동을 각각 말한다.

희로애락의 감정, 려탄변집의 생각, 요일계태의 행동은 우리들 앞에 매일 번갈아가며 나타난다. 심지어 하루에도 몇 번씩 생겨나고 또 없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들이 왜 생겨나고, 또 어떻게 없어지는지 알지 못한다. 장자는 이런 감정, 생각, 행동이 아무도 모르게 생겨나거나 사라지는 걸 두고 퉁소소리와 그 퉁소를 만드는 데 쓰이는 대나무를 통해 설명한다. 그래서 장자는 “퉁소소리가 퉁소의 빈 공간에서 나오고, 또 그 퉁소를 만드는 대나무의 죽순도 수증기라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김에서 돋아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감정, 생각, 행동이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지를 알면 우리는 이것들을 과연 마음속에서 지울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장자는 “아서라! 아서라!” 하며 손을 크게 내젓는다. 매우 뜻밖의 대답이다.

어째서 장자는 이런 감정, 생각, 행동을 없애라는 일반적인 통념과 다른 주문을 우리에게 하는 걸까? 게다가 이런 주문은 색·수·상·행·식을 공(空)한 상태로 놓고 해탈에 이르라는 불가의 주문과 너무나 다르지 않은가? 장자는 이런 감정, 생각, 행동이 없으면 내가 없고, 내가 없으면 이런 감정, 생각, 행동이 나타날 까닭이 없다고 본다. 그래서 이런 감정, 생각, 행동이 있어야 비로소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감정, 생각, 행동을 얼마나 많이 줄여나가면서 사는 가의 문제이다. 옛날 대종사의 한 모습으로 들었던 진인(眞人)도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고 본다. Ι교수·성균관대학교 소통학. smilejtk@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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