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사일화
‘처사시험하기’와 병굿
글. 이정재

선진들의 기록을 보면 처화가 아팠을 당시 여러 가지의 굿을 했다고 한다. 그것은 병굿이었다.  일화 ‘처사시험하기’는 이런 기록과 관련이 있다.
처화에게 처음 처사라는 칭호를 선사한 이원화는 민간신앙적 기도를 올린 또 다른 주체다. 큰골에서 한 양하운 사모와 달리, 이원화도 장소를 달리하여 기도를 드렸다. 한때는 기도드리는 사실을 처화에게 알린다.

(처화) 면벽하고 입정해 있을 때
‘어쩔라고 그래요. 어쩔라고 그래요? 원님되고 싶어서 그래요?’
‘원님이 대수여. 제갈공명같은 사람이 되야제’
하고는 다시 입정에 들었다고 한다.
그러고는 처화 다시 이원화에게 당부하였다.
‘조석으로 찬물로 목욕재계하고 축원을 올려라’(박용덕, <초기교단사1>)

이후로 바랭이네(이원화의 별칭)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배가 고프나 부르나 으레 아침 저녁으로 목욕재계하고 정수를 한 그릇 떠서 후원에 놓고 팔방으로 절을 하고 천지신명께 축원하였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부디 처사양반 둘러싼 사마 잡귀 다 물리쳐버리고 병을 낫게 해주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우리 처사양반 발복하여 고을 원님 되게 하소서.”

처화는 이를 다시 만중생을 구원하는 능력을 달라는 내용으로 고쳐준다. 처화는 이원화의 기대와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처화의 고민을 알 길이 없는 바랭이네는 처화가 정상적이고 현실적인 인물이 되기를 고대했으나, 이때 처화는 초현실적 지경에 치우쳐 있었다. 어찌 되었던 처화의 병이 위중했던 점은 다음의 기록을 볼 때 더 실감이 난다.
“정신병인줄만 알고 점쟁이에게 가 점을 치기도 하고 판수를 데려다 경을 읽히기도 하고, 그도 저도 효험이 없자 답답하여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도 하였다.”(박용덕, <초기교단사 1권> 184쪽.)

앞서, 양하운 사모의 기도는 남편의 병을 낫게 해달라는 내용이 주였음을 살폈다. 교사는 이를 출정오도 전의 육체적 이상현상에 대한 부분을 모르고 진행한 과정으로 풀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에 띄는 대목은 판수를 불러 경을 읽었다는 부분이다. 본고에서 살피고 있는 ‘처사시험하기’는 처사의 경읽기에 해당된다. 판수를 불러 치병을 꾀한 흔적과 서로 겹치는 부분이다.

그러나 용어 ‘처사’는 일견 ‘판수’와 일치하지 않는다. 판수는 경쟁이, 독경쟁이, 법사 등으로 불리며 조선대 민중에 널리 퍼진 민간 신앙의 하나로, 안택고사와 치병에 특히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판수들이 치병굿을 할 때 반드시 읽어야 하는 경은 귀신을 ?는 경으로 유명한 <옥추경>이다. 그런데 어느 지역에서는 이 판수나 법사를 ‘처사’라 칭하기도 한다(충청도 당진, 서산 일대) 하니 전혀 무관치도 아니하다. 판수와 처사시험하기 일화의 관계성은 당시 민속문화 상식에서 볼 때 당연히 관계가 있어야 하는 사안이다.

일화를 보면 부친 박성삼이 처사를 초빙한 것으로 되어있다. 어떤 이유가 있어 치른 의식이었다. 그저 신장을 불러 보이는 이적을 목격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처화에게 어떤 일이 생겼기 때문에 부친은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를 위해 이름난 실력가를 수소문하여 초대를 하였다.

부친이 치병을 위해 처사를 초빙한 시기는 1910년 10월 경으로, 그가 사망하기 이전의 일이다. 처화 19세 경의 일이 아닌가 한다. 이때는 처화가 아직 깊은 병에는 들어있지 않았을 때다. 정도가 심각해진 ‘우두커니 병’은 부친 사망 후 2~3년 뒤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병증은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 전조 증상은 계속되어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구도역정기는 일종의 방황기고 병증기다. 정신과 육체의 부조화에서 오는 심신미약과 그에 따른 정신병적 증세를 일컫는다. 간헐적으로 반복되는 병증은 상당 기간 반복되었던 것이다.

집안과 부친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처화는 가정에 무관심하고, 세상사에는 관심이 없는 넋이 빠진 존재가 되었다. 한두 해도 아니고, 결혼을 한 뒤에도 방황이 계속되고 있으니 뭔가 몹쓸 병을 앓고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느 누구든 처화의 대각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친은 이 병증을 해결하고자 결단을 내린 것이다. 처사를 수소문하여 부른 이유가 여기 있다.

부친이 사망하자 처화는 다급해졌다. 부친에게 몽땅 미뤄뒀던 가정사 일체를 해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막바지에 이르게 된다. 부친 서거 후 약 일 년간은 이럭저럭 버텼지만 남겨진 빚을 독촉하는 압박은 특히 벗어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처화는 이를 해결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처화는 1912년 봄 이원화(바랭이네)와 탈이섬 민어파시에 장사를 하러 가서 돈을 장만하고, 그해 가을 추석이 지나 돌아와 빚을 갚는다. 만신창이 피부병과 우두커니병은 그해 겨울을 지나고 1913년도부터 본격적으로 도진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부친이 초빙했던 경쟁이 처사와, 앞서 언급한 기록처럼 치병을 한 무당이나 판수의 초빙은 적어도 3년의 격차가 있다. 병굿이나 푸닥거리가 얼마동안 지속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낫지도 않는 병을 놓고 번번히 반복하는 일은 좀처럼 벌어지지 않는다. 일단 부친 서거 전까지의 행적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후에는 굿을 할 여력이나 지원자도 없는 고독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때 그를 옆에서 돌봐준 이는 오로지 바랭이네다.

당시 의원의 존재는 귀했다. 동네에 반드시 거주하는 당골들이 치병을 담당하고, 민간의료의 처방과 치료가 주류를 이루던 시기다. 더구나 궁벽한 길룡리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세상일에는 관심이 없고, 동네의 외곽으로 기도나 하고, 밖으로 도사나 구하러 다니며 넋이 나간 것 같은 처화의 행동을 모두 정신병으로 보았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당시 이런 류의 병은 대개 무병으로 진단되고, 오로지 무당이나 박수만이 고칠 수 있는 것으로 인지되었다. 이 치료의 과정에서 또 많은 경우 민간 사제(즉 무당이나 법사, 경쟁이, 판수 등)의 방향으로 인생이 결정되기도 한다. 즉 신직을 수행해야 병을 이길 수 있게 된다.
“무당을 불러 굿을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렇게 기록한 선진의 글(서대원, <회보> 60호)에서도 이런 정황이 잘 드러난다. ‘처사시험하기’에서 초빙된 처사는 자리를 피하여 그 목적이 좌초된 것으로 되어있으나, 굿을 여러 번 했던 정황이 내재되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그래서 용어 ‘처사’는 이런 정황과 무관치 않다. 민속에서 병굿이란 대체로 사람의 몸에 달라붙은 악귀나 사귀를 떼어내거나 쫓아내는 것을 말한다. 이 구신은 대개 조상신들의 조화로 규정된다. 즉 조상을 잘 섬기지 못하여 벌을 받는 것이다. 이 경우 해법은 대체로 구신을 잘 달래어 보내는 방식과 위력을 가해서 쫓아내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소위 앉은굿으로 불리는 독경무는 후자의 방식을 취하고, 선굿을 하는 당골네의 세습무나 강신무는 전자의 방식을 취한다.

소위 미신적인 것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단정할 수는 없다. 문화인류학에서 귀신의 조화라 하는 것을 통과의례의 한 절차로 해석한다. 미신적인 것이라 하여 덮어버릴 일만은 아니다. 통과의례는 역대 성현들이 모두 겪던 과정이었다. 그 과정은 문화와 역사적 차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혹독한 의례를 지낸 뒤 진정한 영웅이 출현하는 것은 인류문명사에 불변의 진리다. 그 과정에서 얻은 명칭 ‘처사’는 그래서 대각 후에도 한동안이지만 지속하여 사용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Ι교수·경희대학교 민속학연구소장. hogo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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