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중한 연원 이야기

일원가족 만들기
프로젝트
유현덕 춘천교당

대종사님의 연원불은 석가모니부처님!
연원이란 처음 원불교에 입교할 때 이끌어 주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나의 연원은 친정어머니 박인진 님이다. 어릴 적에는 엄마를 따라 교당에 놀러 다녔고, 중학생이 되어서야 비로소 사리분별의 안목이 생기게 되면서 나 스스로 교당을 찾아가는 학생교도가 되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학생회 담당 교무님이 교당을 다니면서 갖춰야 하는 예의, 법당 청소하는 방법, 교전 봉독하는 방법 등을 자세히 가르쳐주셨던 일이다.
나는 원불교 교도의 의무 중 하나인 입교연원을 지금까지 3명 하였다. 자녀 2명과 남편이다. 큰아이가 6살, 작은아이가 3살일 때 교당에 처음 나와서 9년간을 잘 다니고 있다. 요즘은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의 마음이 변덕을 부리지만, 여전히 일요일 아침은 무조건 교당에 가야한다고 알고 있다.
원기 100년을 맞이하며 나는 우리 가족이 ‘일원가족’이 되는 것을 서원으로 세웠다. 결혼하고 다시 교당을 나오려 할 때 남편이 반대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했고,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을 찬성했을 때도 감사했다. 그렇지만 남편은 정작 본인에게는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나는 그것 역시도 감사해 하며 몇 년을 지냈다. 하지만 항상 아이들이 “왜 아빠는 같이 교당에 안 가요? 우리도 아빠만 교당에 오시면 되는데….” 라고 물으면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9년간 늘 한결 같이 교당 문 앞까지 친절하게 데려다 주는 남편! 어디서 좋은 선물이 들어오면 교무님 갖다 드리라며 먼저 챙겨주는 남편! 교당에서 맡은 일을 하느라 많은 시간을 할애해도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은 남편! 교당을 새로 짓는다 하니 건축기금을 어떻게 조달하느냐며 걱정해 주는 남편! 누구 때문에, 어떤 상황 때문에 짜증을 내는 나에게 “원불교를 다니는 사람이 그렇게 마음을 쓰면 안 되지!”라고 말하는 남편! 이런 남편 때문에 종종 깜짝 놀라기도 한다. 교당도 다니지 않는 사람이 마음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남편 본인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의미로 입교시키지도 않았다. 그러나 일원가족 만들기라는 서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남편을 꼭 입교 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결국 입교를 시켰다. 기도를 할 때 남편의 이름이 속명으로 불리던 때와는 달리 법명으로 불리던 때의 가슴 뭉클함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내가 서원을 세운 지 3년이 되도록 아직까지 남편의 몸은 교당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지만, 법명을 받은 지금은 한쪽 발이 울타리를 넘어 들어왔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남편 최우진(법명)이 춘천교당의 문 안으로 들어와 교당의 주인으로 신앙하고 수행하며 날마다 정진할 날이~!!


필연은 우연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김예은 정토·대전교당

“알바몬을 통해 뽑은 직원이 입교하고 정토까지 됐어요!”
소태산마음학교에서 함께 근무하는 교무님께서 대외적으로 나를 소개하실 때 빠트리지 않고 하는 이야기 중 하나다. 교무님의 소개말처럼 나는 2014년, 알바몬이라는 구직사이트에서 소태산마음학교 공고를 보고 지원하여 이곳에 취직했다. 사실 나는 전주에서 대학교를 나왔고, 익산이 고향인 친구가 있었음에도 나의 취업 면접을 본 분들이 교무님인 걸 몰랐을 만큼 원불교에 대해 알지 못했다. 지금도 가끔씩 5년 전 면접을 보기 위해 처음 대전교당을 찾았던 날이 떠오른다. 원불교 교당인지도 모른 채 ‘면접장소가 이쯤인 것 같은데, 여기는 어디지?’ 하며 교당 근처를 두리번거렸던 기억이다.
잠깐일 것 같았던 이곳에서의 시간은 올해로 벌써 5년째에 접어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일을 하기 위해 출근하는 직장일 뿐이었다. 2년이 되던 해부터 교구 교무님들과 함께하는 아침회의에 참석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원불교 교전>을 읽기 시작했다. 우리는 각자 맡은 분야를 공부해서 아침마다 그 내용을 발표 했는데, 나에게는 대종경을 한 장씩 읽고 감상을 이야기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매일 해야 하는 숙제 아닌 숙제가 생기고부터 나는 아침발표 준비를 위해 집에 가서도 교전을 보기 시작했다. 평소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성격이라 처음에는 그 시간이 무척 긴장되어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미숙한 발표에도 교무님들은 항상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다행히 갈수록 긴장감은 덜어지고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어느 날, 당시 이름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내게 교무님께서 예쁜 이름을 지어주겠다는 제안을 하셨다.(내 속명은 김미영이다.) 그렇게 ‘김미영 팀장님’이라는 별명 대신 김예은이라는 새 이름을 받아 정식으로 입교를 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곳에서 영생의 반려자를 만나 새내기 정토의 길까지 걷고 있다. 
오늘이 오기까지 나만이 가진 특별한 계기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원불교 교법을 접하고 그것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짧은 나의 인생 그래프를 그려본다면, 5년 전 내 인생의 가장 내리막길을 걷고 있을 때 소태산마음학교와 원불교를 만났다. 어쩌면 그것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때의 나는 내가 지금 힘든지, 지쳐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내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니 매일매일이 똑같은 하루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만난 소태산마음학교와 원불교 그리고 마음공부가 내 인생을 조금씩 밝혀 주었다.
‘우연이라고 취급된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라는 한 역사학자의 말을 떠올리며 생각해본다. 원불교는 내 인생에 우연의 옷을 입고 나타난 필연이 아닐까. 요즘은 이 소중한 인연 덕분에 하루하루가 너무나 행복하고 감사하다.


부부 모임에서 만난
특별한 인연
김법조 영등교당

나는 원불교 성지가 있는 익산에서 태어나 59년째 익산을 떠나지 않고 살고 있다. 여고 때 종립학교인 원광여자종합고등학교(현 원광정보예술고등학교)를 다녔는데도, 생각해보면 원불교와의 인연은 참으로 더뎠던 것 같다.
스물여섯이 되던 해에 결혼을 하고 신랑 친구들 부부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 모임에는 총 일곱 쌍의 부부가 있었는데, 모두 교회를 다녔고 유일하게 원불교를 다니는 부부가 한 쌍 있었다.(영등교당 홍산 송두영, 수타원 두계환) 그 형님 부부와 한 동네 위 아랫집에 살게 되는 인연이 되어 알고 지낸 지 4~5년 정도 되었을 무렵. 나는 수타원 형님에게 원불교에 나가봐도 되냐고 물었다. 형님은 흔쾌히 그래도 된다며 같이 교당에 가자고 하셨다.
그때까지 특별한 종교를 갖지 않은 채 가끔 절에 다니고 있었던 나는, 첫 법회에서 반야바라밀다심경 독경을 듣고 깜짝 놀랐다. 법회를 시작할 때 암송하는 일상수행의 요법 제5조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자’라는 말을 읽었을 때는 너무나도 가슴에 와 닿았던 기억도 생생하다. 이 법문은 내가 지금까지도 가장 좋아하는 법문이자 삶의 표준이다.
완전 초짜시절에 달수로는 서너 달, 법회에 나간 횟수로는 5번 정도나 됐을까? 발을 들이긴 했어도 법회에 몇 번 참석을 못하고 있던 어느 날. 정월 초하루 명절을 코앞에 두고 시아버님이 열반하시는 일이 벌어졌다. 시아버님 열반 소식을 바로 접한 수타원 형님은 당시 영등교당 유현실 교무님께 말씀을 드렸고, 교무님은 명절날인 데다가 한 겨울이라 춥디 추운 날씨인데도 우리 집에 직접 오셔서 열반 독경, 발인 기도식, 장지 안치식까지 정성스럽게 다 해주셨다.
우리는 원불교 의식도 제대로 몰랐던 때, 교무님은 천도재를 지내면 좋겠다고 말씀하셨고, 교당에서 시아버님 천도재를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아버님 천도재를 계기로 우리 가족 모두 교당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당시, 결혼 초에 살던 교당 근처 시댁에서 분가해 금마에 살고 있을 때였다. 차로도 30분쯤은 걸리는 꽤 먼 거리. 하지만 그게 멀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본격적으로 교당을 다니기 시작했다.
“원불교에 나가봐도 되냐?”고 물은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수타원 형님과는 29년 동안 함께 한 교당을 다니고 있다. 그동안 좋은 법연들을 많이 만났고 물론 지금도 많지만, 그래도 수타원 형님과는 조금 더, 아니 많이 특별한 인연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 더해 우리가 원불교 신앙을 갖고 교당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해주신 유현실 교무님의 은혜도 평생 못 잊을 것 같다. 원불교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우리에게 ‘원불교는 이런 곳’이라고 가르쳐주신 스승님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그분들의 기도 속에 살고 있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좋은 일, 힘든 일, 나쁜 일들이 있을 때마다 “원불교를 만난 것이 천만다행이다.”라고 이야기하며 살아오고 있다.
“저와 우리 가족을 원불교로 인도해주시고 잘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만덕산에서
다시 만난 원불교
이정민 전북대학교·원대연 부회장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껏 나는 나 자신을 날카롭고, 예민하며, 거기다가 이기적이기까지 한 모습을 가진 못난 아이였다고 생각해왔다.
누군가를 위해 웃거나 울어주기에는 내 온도가 너무 낮다고만 생각해 슬픔, 혹은 기쁨과 같은 감정을 드러내기를 꺼렸다. 사실 이런 내 모습이 싫어 시도 때도 없이 짜증이 나기도 했고, 열이 오를 정도로 화가 나기도 했다. 이렇게 마주하기 싫은 내 모습들과 문득 마주치게 될 때면 한없이 내 자신이 작게 보였다.
스무 살 언저리의 겨울, 그러니까 어른도, 아이도 아닌 애매한 경계에서 나는 어떤 분의 소개로 우연히 대학선방에 입선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교무님임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 나는 교당이니 마음공부니 하는 것들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사실 관심을 두고 싶지도 않았던 원불교에 대해 요상한 거부감마저 있었던 내게 겨울 만덕산에서의 일주일은 나를 세게 뒤흔들었다.
선방을 통해 다시 만난 원불교는 나에게 ‘거울’이었다. 처음으로 마주하는 것 같은 새로운 내가 사실은 여태껏 그냥 나였던 것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인정, 다른 교우들을 통해 바라보게 된 나는 그동안 가둬두었던 못난 내 모습과는 사뭇 다른 말랑한 사람이었구나 하는 받아들임에 슬며시 위로를 받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껴안고 머리가 아플 정도로 울어보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것에 웃어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밉고 예쁜 것 없이 그냥 나, 그냥 내 마음을 마주하는 것은 어색하고 익숙치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를 규정짓던 모든 껍데기를 벗어버리니 비로소 반들반들한 나를 만났다. 신기하고 벅찬 경험이었다. 온갖 군데에 신경 쓰기에만 급급했던 나는 대학선방에서 오롯이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고, 타인을 사랑할 줄 아는 법을 배웠다.
입교를 한 지는 연 수로 따지자면 스무 해가 훌쩍 넘어가지만 나는 지난 겨울이 원불교를 진정으로 다시 만난 기점으로 생각한다. 한 해 전 내가 느꼈던 원불교의 의미와 지금의 원불교는 완전히 다르다. 공기가 있어 숨을 쉴 수 있고, 땅이 있어 생명이 자라고, 물이 있어 메마르지 않지만 아주 당연하기에 가장 잊기 쉬운 것처럼, 원불교는 당연하게 내 삶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었는데 나는 내가 만든 상(像)에만 갇혀 외면했었다.
스물 둘의 나는 무언가를 얻고자 교당을 다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놀러 다니는 것도 아니다. 내게 원불교는 ‘쉼’ 이다. 요즘은 부담스럽게만 느껴졌던 교무님들이 포근하게 다가오고, 가기 싫었던 교당이라는 공간이 조금씩 편안해져 가는 중이다. 속도는 아직 느릿하지만 나도 이렇게 원불교 교도로 성장해 나가는 중인가 보다.


나의 연원불님!
감사합니다
최성원 원무·북일교당

어릴 적 할머니를 따라 절에 가게 되었는데 절이 참 편안하고 승복을 입은 스님의 모습도 보기 좋았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불교 동아리인 ‘룸비니’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면서 불심을 키웠죠.
이런 저에게 원기 70년(1985)에 중학교 동창인 김인식(천국) 님이 교당에 한 번만 나가자고 수차례 권유하였습니다. 친구의 청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 딱 한 번만 가겠다며 청년법회에 나가게 됐죠. 법회 후 황대원 교무님께서 공양해주신 차 한 잔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후 원불교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할머니께서 열반하신 후, 북일교당의 주관하에 발인식부터 49재 천도식에 이르기까지 의식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고인의 완전한 해탈·천도를 위한 교무님들의 지극한 정성과 교도님들의 따뜻한 관심,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에 와닿는 원불교 교리가 너무 좋아 그때 우리 가족 모두가 입교하게 되었습니다.
교당에 다니면서 문예부장, 단장, 청년회장, 이리교구 청년연합회장, 솔솔송 자원봉사대 대장, 일반법회 단장 등 수많은 역할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계·동계 연 2회로 진행되었던 교당 청년훈련에서도 재미있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지리산, 동학사와 갑사, 강천산, 무주 구천동 등에서 야영하며 함께 훈련을 나고 마셨던 곡차 한 잔의 추억도 생각납니다. 허물없이 속 이야기를 나누며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쌓아, 지금도 만나기만 하면 서로 좋아서 함박웃음을 짓습니다. 특히 교당 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일원가정도 꾸렸죠.
요즘의 저는 교당에서는 신실한 교도로, 솔솔송 자원봉사대에서는 나눔을 실천하는 봉사자로, 학교에서는 마음공부로 도의교육을 실천하는 참교육자이자 교화자로서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도부회장, 교화협의회장, 원무, 원불교교사회 회장을 맡으며, 정성을 쏟아 교당으로 인도한 법우들이 교당의 참주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사실 원기 80년에 당시 법무실장이셨던 황직평 종사님께서 출가를 권유하셨으나 곧바로 승낙을 못 하고 지냈습니다. 그러다 대산 종사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장례식을 보면서 스승님들께 진심으로 참회하고 성불제중의 서원 아래 참다운 불제자의 삶을 살고자 다짐하며 재가 교화자인 원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수행인으로서의 제 모습이 귀감이 된다며 기독교 신앙을 하던 솔솔송 자원봉사자가 원불교로 개종을 한 적도 있었고, 또 저와의 인연으로 입교하거나 출가서원을 세워 열심히 교화활동을 펼치고 있는 제자들까지 있으니, 이 얼마나 고맙고 보람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원불교 원무로서 ‘함양대원기 보보초삼계 함양대원기 염념도중생(涵養大圓氣 步步招三界 涵養大圓氣 念念度衆生)’으로 살고자 한결같은 정성으로 쉼 없이 정진하겠습니다. 저를 원불교로 이끌어준 연원이며 친구이자 소중한 도반인 김인식(천국) 님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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