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학의 개벽을 위한 전제 (1)
- 영산시대 교리형성과 그 특징 -
글. 박윤철

종교가 성립하는 데는 갖추어야 할 기본 요소가 있다. 창시자 곧 교조가 있어야 하고, 교조의 가르침을 담은 교서(경전)가 있어야 하며, 교조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결사체 곧 교단이 있어야 한다. 그 다음 종교의례 곧 교례, 끝으로 교조의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펼치는 포교활동 곧 교화 등이 종교 성립의 기본 요소이다.
원불교의 제도종교화 과정은 영산시대, 변산시대, 익산시대 등을 거치면서 이루어지는바, 영산시대란 교조 소태산이 탄생하는 1891년부터 유년시절의 발심, 소년기의 구도, 그리고 청년기의 유력과 입정 단계를 거쳐 대각을 성취하는 1916년까지의 전기(前期), 대각 직후에 이루어진 방편교화 단계를 거쳐 저축조합운동과 방언공사, 구인기도 및 법인성사 등을 이루는 1919년까지의 후기(後期)로 나뉜다.

영산시대는 일찍부터 원불교 역사상 ‘정신적, 물질적 기초가 확립된 시기’라고 강조되어 왔다. 구체적으로 1919년 8월 21일에 소태산의 아홉 제자의 사무여한(死無余恨)기도운동의 결과로 성취하는 법인성사(法認聖事)를 ‘정신적 기초’가 확립되는 일대 사건으로, 그리고 저축조합운동과 방언공사를 통해 드러난 창립정신 발휘 등을 ‘물질적 기초’ 확립의 일대 사건으로 인식해 온 것이 바로 그것이다.
문제는 원불교 성립의 핵심요소에 해당하는 교리와 관련하여 영산시대에 대해서는 교학적 관심이나 연구가 매우 빈약하다는 점이다. 이에 이번 호에서는 영산시대 교리형성 과정과 그 특징에 대해 주목해 보고자 한다.

주지하듯이, 영산시대 전기는 소태산이 ‘대각’하기 이전이므로 특정한 종교공동체가 형성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교리형성과 관련한 공식적 움직임은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교리형성과 관련하여 이 시기에 대해서도 일정하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영산시대 전기에 이루어지는 소태산의 사상형성 과정과 그 내용이 대각 이후의 교리형성, 나아가 현행 원불교 교리의 형성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산시대 전기, 곧 소태산의 유소년기에 있어 그 사상형성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불법연구회창건사>에 의하면, 이 시기 소태산의 사상형성은 유불도 삼교 및 동학사상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예를 들면, 소태산은 서당(書堂) 교육을 통해 초보적 수준의 유교사상을 습득하였으며, 시제(時祭) 등과 같은 의례를 통해서도 유교적 영향을 받고 있었다. 도사(道士)가 등장하는 <조웅전>과 같은 한글소설 등을 통해 도교 계통의 민간신앙이나 의례를 접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뿐만 아니라, 영광에는 ‘99 암자’가 있었다고 할 정도로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불교와 인연이 깊었기 때문에 어린 소태산이 직간접적으로 불교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은 명약관화하다. 그 외, 소태산이 네 살 때인 1894년을 전후하여 영광 땅은 ‘동학의 소굴’로 불리고 있었기 때문에 성장과정에 동학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  

이처럼 유소년기에 유불도 삼교 및 동학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사상형성을 하고 있었던 소태산은 1916년 4월에 대각 곧 큰 깨달음을 이룬다. 그런데, 소태산의 대각과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지나가던 천도교인들이 <동경대전>속의 ‘포덕문’에 있는 “오유영부 기명선약 기형태극 우형궁궁(吾有靈符 其名仙藥 其形太極 又形弓弓)”이라는 구절에 대해 서로 논란하는 것을 듣고 “돈연히 그 의지가 해석되었다.”는 사실, 대각 직후 여러 종교의 경전을 열람하는 가운데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등 동학(천도교) 경전도 함께 열람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영산시대 후기에 이루어지는 교리형성이 동학(천도교)과 같이 근대한국에서 자생한 개벽(開闢)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가운데 이루어지게 될 것임을 시사한다.

구체적으로, 영산시대 후기 교리형성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는가? <불법연구회창건사>에 의하면, 소태산은 대각 직후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라는 큰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무산자의 아들로서, 그리고 이름도 없던 한 젊은이가 우주의 진리를 대각했다는 사실을 믿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지하듯이 소태산은 대각을 이루기까지 세상을 향해 내놓을 만한 학력이나 사회적 경력이 전혀 없었다. 집안의 경제적 기반이나 가문의 전통 또한 보잘것  없는, 그야말로 풀뿌리 민중 출신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소태산 주변에는 그가 대각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이나,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을 믿어줄 만한 사람이 전혀 없었다.

그리하여 자신이 깨달은 진리의 소식을 민중들에게 전파하고자 했을 때 소태산은 민중들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을 찾을 수 없었다. 바로 이것이 대각 후에 소태산의 머리를 떠나지 아니한 화두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의 배경이다. 깊은 고민 속에서 길을 모색하던 소태산은 근대한국 개벽종교, 그 중에서도 특히 동학(천도교)과 증산교에 주목했다. 이런 사실은 영산시대 후기에 소태산이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았거나 또는 직접 저술한 다수의 한시(漢詩)와 가사(歌詞)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시기 소태산의 저작은 동학=천도교 계열의 가사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들이 대부분이며, 도교나 민간신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저작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저작이 탄식가, 경축가, 권도가, 성계명시독, 법의대전, 백일소, 심적편 등이다.

영산시대 후기에 민중들과의 접점, 아니 민중들로부터 신뢰를 얻기 위해 소태산이 근대한국 개벽종교들로부터 수용했거나 또는 그 영향을 받아 저술한 저작들을 일러 방편교서(方便敎書)라고 부르고자 한다. 방편교서는 변산시대인 1920년경에 소태산 스스로 ‘불태우라.’고 명함으로써 정식 경전으로 성립되는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교단이 정식으로 출범하기 이전에 교조가 자신의 깨달음을 전파하는 효과적인 방안의 하나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또한 창립기 교단의 교리형성 및 초기교화의 특징을 이해하는 데도 유용한 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방편교서는 무명의 젊은이였던 소태산과 그를 둘러싼 민중들을 효과적으로 ‘결합’하게 만든 방편으로써 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나아가 최근 교학연구 성과에 따르면, 변산시대와 익산시대에 이루어지는 교리형성 과정에서 방편교서 일부 내용이 수용됨으로써 원불교 교리형성사에서 무시할 수 없는 위상을 지니는 것으로 드러났다. 다만, 한 가지 명기(明記)해 둘 것은 영산시대 후기에 성립된 이른바 방편교서에는 변산시대 및 익산시대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불교적 색채가 농후하지 않다는 점이다.

요약하건대, 원불교 교조 소태산의 유소년기 사상형성 과정 및 영산시대의 교리형성 과정에서는 근대한국 개벽종교 사상과의 교섭이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이것은 원불교를 일러 ‘후천을 여는 새 종교이자, 개벽을 여는 새 불교’라 정의할 수 있는 결정적 증거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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