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사… 자연의 원리에 따라
인간 세상의 이치를 파악하는 스승 
글. 김정탁

대종사는 장자가 사용하기 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은 개념인 듯 싶다.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 문헌은 물론이고, 그 이전의 중국고대 문헌에서 대종사란 개념이 좀처럼 발견되지 않아서이다. 그 후 중국 불교가 대종사란 개념을 사용해 일반화함으로써 우리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니 대종사는 장자의 독창적 개념에 해당한다. 더욱이 장자 자신이 직접 썼다 여겨지는 <장자> 내편의 7편 중 한 편에 장자는 ‘대종사’란 제목을 달았다. 그래서 대종사란 개념을 장자보다 먼저 사용한 사람이 혹시 있더라도 장자만큼 대종사 의미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아니라고 본다. 장자가 언급한 대종사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앎(知)의 본질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앎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연의 원리를 깨닫는 앎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앎이다. 자연의 원리라 하면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의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원리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선 자연의 원리를 이보다 훨씬 넓고 포괄적으로 보기에, 이를 천도(天道)라고 말한다. 또 인간 세상의 이치라 하면 서양학문이 말하는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의 이치쯤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 말하는 인간 세상의 이치는 과학이기보다 도리(道理) 쪽에 가깝다. 그래서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를 인도(人道)로, 세상을 다스리는 도리를 치도(治道)로 규정한다. 여기서 장자는 자연의 원리를 알고, 인간 세상의 이치를 알면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라고 규정한다. 그런 사람이 바로 대종사(大宗師), 즉 큰 근원을 아는 스승이다.

먼저 자연의 원리, 즉 천도를 아는 사람은 자연이 하는 바대로 살아간다. 즉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는 것처럼 무위자연의 원리에 따라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겨울이 춥다고 봄이 빨리 오길 고대하지 않고, 여름이 덥다고 가을이 빨리 왔으면 하고 바라지 않는다. 또 봄이 화창하다고 오래 즐기길 기대하지 않고, 가을이 아름답다고 오래 머물길 바라지 않는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모두 자연 변화의 한 단면이라고 여길 뿐이며, 이에 대해 좋다 싫다 등의 감정을 표출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태어나는 것도 자연 변화의 한 단면이고, 죽는 것도 자연 변화의 한 단면이라 여기므로 억지로 오래 살겠다고 버티지 않는다. 그래서 적당할 때 왔다가 적당할 때 죽는 게 자연의 원리에 따른 삶이라 여긴다.         

이에 반해 인간 세상의 이치는 자신이 아는 바로 자신이 알지 못하는 바를 채움으로써 깨닫는다. 무슨 말인가?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배움이 어떤 지 살펴보면 금방 이해가 간다. 글을 쓰려면 먼저 단어를 알아야 하고, 단어를 알면 이에 기초한 문법을 이해해야 하고, 문법을 이해하고 나야만 비로소 글을 쓸 수 있다. 또 명사와 동사로 이루어진 정보전달 중심의 글을 쓰다가 여기에 익숙해지면 형용사와 부사까지 보태진 아름다운 문학적 글을 쓰면서 글의 완성도를 높여간다. 또 산수를 알아야 수학으로 옮아가고, 수학을 이해하고 나서야 논리적 사고를 터득할 수 있다. 이것이 아는 바로 알지 못하는 바를 채워 깨달아가는 방식이다. 물론 이런 식의 앎일지라도 우리가 중간에 일찍 죽어서 타고난 수명을 다하지 못하면 앎이 제대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그런데 이런 앎의 방식에도 한계가 있다. 그것은 그 앎이 의거하는 데가 특별히 없어서이다. 이 점이 자연의 원리와 차이점이다. 그렇다면 인간 세상의 이치가 의거하는 데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장자는 자연의 원리에 의거해야만 인간 세상의 이치가 제대로 밝혀진다고 본다. 그래서 ‘자연의 원리라고 여기는 바가 인간 세상의 이치가 아닌지, 또 인간 세상의 이치라고 여기는 바가 자연의 원리가 아닌지 어찌 알겠느냐?’고 반문한다. 이는 자연의 원리가 곧 인간 세상의 이치이고, 또 인간 세상의 이치가 곧 자연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만큼 자연의 원리와 인간 세상의 이치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야 한다. 동아시아 학문에 있어서 인도(人道)와 치도(治道)를 독자적인 이론체계로 구성하지 않고 천도에 입각해서 펼치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이처럼 자연의 원리에 따라 인간 세상 이치를 밝히는 사람이 진인(眞人)이다. 즉 진인은 인간 세상의 이치를 자연의 원리에 따라 파악한다. 그래서 진인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인간 세상의 이치를 제대로 밝힐 수 있는 참된 앎이 등장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참된 앎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그 실마리를 <장자> 제물론에서 찾을 수 있다.

옛날 사람 중엔 앎이 지극한 이가 있다. 어째서 앎이 지극한가?
사물의 존재를 처음부터 의식하지 않아서이다. 그 지혜는 너무나 지극하고 최고인지라 더 이상 보탤 게 없다.
다음으로 지극한 앎은 사물의 존재만 의식할 뿐 사물을 애초부터 이것/저것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그 다음으로 지극한 앎은 사물을 이것/저것으로 구분할 뿐 애초부터 옳음/그름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그런데 옳음/그름의 구분이 선명해지면 이것이 도가 이지러져 허물어지는 원인이다. 도가 이지러져 허물어지면 그 때부터 좋고 싫음과 같은 편애가 생겨난다.1)

 장자에 따르면 최고의 앎은 사물을 의식하지 않는다. 즉 사물이 있는지 없는지 그 자체를 인식하지 않는다. 그래서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삶일 수 있다. 이것은 죽음을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또 삶을 새로운 죽음의 시작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훌륭한 앎은 사물의 존재만 의식할 뿐 사물을 이것/저것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즉 이것은 큰데 저것은 작다든지 등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그 다음으로 훌륭한 앎은 사물을 이것/저것으로만 구분할 뿐 옳음/그름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즉 큰 것은 좋고, 작은 것은 나쁘다든지 등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여기까지는 모두 참된 앎에 속한다.

이에 반해 옳음/그름으로까지 구분하는 앎은 참된 앎이 아니다. 옳음/그름으로 구분하면 자연의 결을 크게 훼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양의 학문관은 기본적으로 여기에 기반한다. 그래서 서양학문은 이것/저것은 물론이고, 옮음/그름 등으로 사물의 의미를 가능한 많이 구분하려고 든다. 또 이렇게 구분하는 걸 과학적이라고 여긴다. 주자학이 강조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관점도 이런 서양학문관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격물치지란 사물간의 차이를 통해 앎에 이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대종사의 ‘종(宗)’도 참된 앎과 관련이 깊다. 종은 근원이란 뜻을 지닌다. 그래서 대종사(大宗師)를 직역하면 큰 근원을 지닌 스승이다. 그렇다면 큰 근원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이에 대한 단초를 <장자> 천하편에서 찾을 수 있다.

“근원에서 이탈하지 않은 사람을 천인이라 부르고, 순수함에서 이탈하지 않은 사람을 신인이라 부르고, 진실함에서 이탈하지 않은 사람을 진인이라 부른다.”2)
 
그러니 천인(天人)이란 근원에서 이탈하지 않는 사람이다. 근원에서 이탈하지 않는다는 건 자연의 결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살아간다는 말이다. 대종사도 큰 근원을 지닌 스승이므로 천인처럼 자연의 원리를 깨달아 자연의 결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니 대종사는 옛날의 진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연의 원리에 따라 인간 세상의 이치를 파악하는 사람이다. Ι교수·성균관대학교 소통학. smilejtk@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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