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유가·선가적 호칭 ‘처사’
글. 이정재

처화는 대각을 전후하여 처사로 불렸다. 특히 가장 지척에서 그를 돌보았던 이원화에 의해 그렇게 명명되었다. 그런데 처사라는 명칭은 대각을 한 후에도 사용된다. 변산 봉래정사 시기에 소태산은 자신을 스스로 처사라 하였다.

처사와 관련된 입장은 이렇게 세 분야로 나누어진다. ‘부친이 초대했던 처사’, ‘대각 전 집안에서 존칭된 처사’, 그리고 ‘대각 후 스스로 자신을 명명한 처사’가 그것이다.
이 셋 모두 같은 것인지 서로 다른 것인지, 그리고 그 동이점의 정도는 어떤지를 밝히기란 용이한 문제가 아니다. 처사에 대한 사전적 정의부터 더 그렇다.
<한국고전용어사전>에서는 ‘처사; 세파의 표면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 즉 유교적 교양을 갖춘 선비.’로 풀고 있다. 유교적 입장에 한정한 풀이이다.

불교 쪽에서는 좀 다르다. <시공불교사전>에서는 ‘처사; 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의 가르침에 따르는 남자신도. 출가하지 않고 법명을 받은 재가의 남자. 속인으로 임시로 절에 머무는 남자.’를 일컫는 것으로 설명한다. 역시 불교적 관점의 설명이다.
<두산백과사전>은 좀 더 구체적으로 풀이한다. ‘16세기 붕당정치로 인해 고향에서 사림을 형성하여 지방에 은둔하게 된 선비로 특정하기도 한다. 이들을 은사, 유일, 은일, 일사, 일민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고 했다.

일단 이들을 종합하건대 처사란 용어는 유가적 전통에서 시작하였던 것 같다. 즉 처사는 처음 16세기 붕당정치 이후 지방에 은거하던 유교 선비를 지칭하던 것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다. 이는 점차 다른 영역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된 데는 이들의 위치와도 관련이 있는데, 이들은 사상적으로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엄격한 유교 사회에서도 낙향한 처사들은 불교와 도교와의 교류를 자유로 하였다. 최초의 처사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서경덕이나 남명 조식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들은 주기론자이면서 정통 성리학에서 비켜있는 사람들이었다. 매우 도·선적인 경향을 내보였던 인물들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처사는 이들 불가와 도가의 수행자들 이외에도 벼슬하지 않은 유식자들을 통칭하여 사용하기에 이른다. 민간신앙 관계자들에게도 확대 명명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역학자, 명리학 혹은 법사, 독경자들에게도 처사라는 용어가 두루 사용되기에 이른다.

앞서 소개한 일화에 등장한 ‘초능력을 발휘하고 신장을 부를 수 있다고 했던 처사’가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낙향한 선비와 불가의 처사들은 신통력과 육정육갑 등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의 처사를 민간신앙의 한 부류로만 단정하기는 이르고 내용을 좀 더 분석해야 한다.
확실한 것은 소태산에게 부여된 것이 일화의 주인공 바로 그 부류의 처사인지는 아직 확정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처사는 낙향한 선비, 남자 불교 신도 혹은 수행자, 도가계통의 신선 수행자, 신종교기 한 수행자로서의 도꾼 등의 넓은 의미로 확대할 수 있겠다.
가장 널리 쓰이는 개념은 낙향한 선비와, 불교 신도의 개념이다. 그러나 처화의 경우 그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초야에 묻혀 공부를 하거나 도를 수행하는 의미의 처사를 상정할 수 있겠으나 이도 역시 적합하지 않다.

그럼에도 처화의 형편과 가장 잘 어울리는 개념은 ‘불교신자로서의 처사’다. 부처 시험하기와 금강경과 백학명 스님과의 관계에서 이미 살펴보았던 바, 처화는 불교에 상당 수준 심취하기도 하였다. 결정적인 단서는 백학명 유허비에 적혀있는 ‘우바새 박중빈’에 대한 대목과 <조선불교혁신론>이 되겠다. 또 ‘불법연구회’라는 간판을 내걸었던 바도 여기 해당된다. 이런 사정은 결국 원불교를 큰 범위의 불교의 테두리에 위치하게 된 것과도 연결된다.
이런 친밀도에도 불구하고 불가적 처사는 여전히 만족된 용어가 아니다. 단순한 신도가 아니고 비중이 높은 학명의 제자였기 때문이다. 불교와의 관계성만으로 그가 사용했던 처사를 이해하고 넘어가기에는 여전히 미흡함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양하운 사모와 이원화의 기도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들의 종교는 민간신앙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산골짜기나 집 뒤쪽에 마련된 기도처란 보통 가정신앙, 산신신앙이라 일컬어지는 민간신앙, 자연신앙 혹은 원시신앙의 부류다. 그리고 그의 기도는 여느 때나 마찬가지로 현실적 성공을 기대했던 것이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궁벽한 시기를 헤쳐가기 위해서는 현실적 장벽을 넘는 것이 관건이기 때문이다. 그 표현이 그의 소망 전부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 인간으로서 원만한 인격을 갖추고 남부럽지 않은 위상을 가지는 것도 포함되었으리라. 그럼에도 그가 바라는 것에는 역시 현실적인 성공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의 바람과 관계되는 것은 유교적 용어로서의 처사다. 그러나 이 용어는 이미 처화와 큰 관련이 없다. 그리고 처사의 본래적 의미는 이미 벼슬을 하거나 유학적 일가를 이룬 후 중앙 무대를 떠나 시골에 처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원화는 처화를 매우 높이 여겨 처사라 이름 붙여준다. 그는 박중빈이 훗날 원님같은 벼슬을 할 것으로 기대하였던 바라 전한다. 이원화에게 처화는 유학적 벼슬에 나갈 사람으로 인식하였을 가능성이 있었다고 하겠으나, 처화는 한학을 중간에 중지하였고 관직에 진출하는 데는 뜻이 없었다. 이런 내용을 미루어 볼 때 이원화가 사용한 처사라는 용어는 유가적 관점의 의미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원화의 종교가 불교와의 관련성 여부를 배제할 수 없다. 그녀가 불갑사나 여타의 절을 다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처사가 불가적 용어라면 불가의 남신도의 의미가 담겨진 것으로 우바새와 같은 명칭의 처사로 규정된다. 그 한계는 앞서 언급하였다. 이 당시 즉 조선 후기 불가의 명맥은 존재감이 없었다. 이를 통해 원님이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불가적 우바새의 의미로 불렀다면 훗날의 스님이나 친불교적 신도를 지칭한 것인데, 이 역시 사회적 성공과는 별개의 분야였기 때문에 이원화의 기도와는 다른 방향에 있는 것이다.
처화에게 처사라 칭해준 이는 이원화 뿐만이 아니었다. 양하운 사모도 자기 남편을 처사 양반이라고 높여 불렀다. “우리 처사 양반 소원 풀어주고 병이 나아주기를 비옵고 비옵니다. 비옵고 비옵니다.”

양하운 사모는 산골짜기 개암골 기도터에 정화수를 떠놓고 사방으로 절을 하고는 일심으로 기도를 올렸다. 이렇게 3년간 정성을 들였다고 한다. 이 시기는 아마도 처화가 대각하기 전까지의 일이었을 것이다. 즉 1913년 봄부터 대각까지가 아닌가 한다. 기도의 내용은 ‘병을 나아주게 하여달라.’ 한 점이 주다. 대각 전 소위 ‘우두커니 병’과 머리와 온몸에 퍼진 ‘만신창이 피부병’(박용덕, <초기교단사>, 180~181쪽)을 겪던 시기를 가리킨다. 처화의 병은 심각했던 것이다. 식구 모두가 나서서 정성을 들였던 흔적이 곳곳에 배어있다. ‘처사 시험하기’를 이때의 병과 연결시킬 수 있겠으나 시기가 맞지 않는다. 일화는 최소한 부친의 사망(1910년 겨울) 전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처사’라는 호칭은 언젠가부터 집안에서 공식 호칭으로 불려졌던 것이라 여겨진다. 그 시기는 처화가 병을 앓게 된 시점부터로 봐야한다. 그리고 처화에게 적용된 병은 이미 부친의 사망 이전부터 유래했음이 유추된다.

아무튼 민간신앙적 용어 처사양반은 선가적 용어라 칭해질 수 있겠다. 아울러 유·불의 용어 처사와 선가의 용어 처사는 그 쓰임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음이 돋보인다. Ι교수·경희대학교 민속학연구소장. hogo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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