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무님이 된 후임
글. 김용원

최근에 SNS를 통해 20여 년 전 같은 부대에서 생활했던 후임병의 근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27살 늦은 나이에 입대를 해서 힘든 군 생활을 하고 있던 때, 같은 고향출신의 후임병이 들어왔지요. 그 친구도 원불교 교도였고 저도 군입대 직전에 입교한 신입교도였기에 여러 가지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가 복무한 부대는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에서 가까운 곳으로, 겨울은 무척 춥고 눈도 많이 내리는 곳이었습니다. 어느 겨울 토요일 아침, 몸살감기 때문에 전날 내린 눈을 치우다 말고 내무반에 들어와 끙끙 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행정반에서 ‘친척이 면회를 왔으니 외박을 나가라.’는 전달을 받았습니다. 아침과 점심도 못 먹은 채 앓는 중이기도 했고, 갑작스레 면회 올 사람이 없는데 누가 온 건지 의아하기도 했습니다.
늦은 나이에 군입대를 했고, 부모님에게도 ‘거리도 멀고 하니 굳이 면회는 오지 마셔라. 가끔씩 휴가 가면 된다.’고 말씀드렸기에 군생활 동안 형님 내외분만 딱 한번 면회를 왔던 차였습니다.
행정반에서 외박증을 받아 면회실에 가보니 전혀 모르는 분이 와 계셨습니다. 알고 보니 아침에 가족들이 면회를 와서 먼저 외박을 나간 후임병이, 동송읍에 있는 철원교당 교무님에게 부탁을 해서 교도님 한분이 제 친척이라고 말하고 면회를 신청하셨던 것입니다. 형님 내외분이 면회를 왔을 때 철원교당 교무님에게 인사를 드렸기에 다행히 교무님을 알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덕분에 읍내에서 약을 지어먹고 철원교당에서 하룻밤 몸조리를 잘하고 부대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한번은 야간 보초를 같이 나갔을 때 그 후임병과 출가에 대한 얘기를 나눈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당시 입교한지도 얼마 안되고 해서 출가에 대한 생각이 없었지만, 그 후임병은 출가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힘든 군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제대하던 날, 그 후임병에게 군 생활 잘하고 건강히 제대하라는 말을 남기고 20여 년이 흘렀습니다. 제대 후에도 그 후임병을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최근 그 후임병의 근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SNS에서 본 그 후임병은 ‘역시나’ 교무님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교당에서 열심히 근무하고 계신 그 교무님에게 연락 한번 드리고 찾아뵐까 합니다.


지금 이대로의 행복!
글. 박종락

“너는 왜 힘들고 재미없는 그 길을 가려고 해?”
친구들의 질문에 출가 당시로서는 자신 있게 답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굳이 제가 말하지 않아도 친구들이 먼저 답을 합니다. “너, 그 길을 참 잘 선택한 것 같아!”
고등학교시절 사춘기에 접어들어 원불교를 알게 되었습니다. 대중문화가 전무했던 시절, 교당은 저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지요. 교무님의 따듯한 설교가 있었고, 또래들과 어울릴 수 있는 재미와 정보가 있는 행복의 터전이었답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고민하던 중, 돈 보다는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었고 원불교 성직자의 길이 저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곳이라 여겨졌습니다. 평범한 길을 원했던 어머니와 가족들은 원불교 출가에 무척이나 반대가 심했습니다. 타이르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며 저를 설득했지만 그럴수록 저의 뜻은 오히려 더 굳건해졌습니다. 몹시 추웠던 어느 겨울날은 혼자 대청마루에 나와 잠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가족들의 반대에 항의하는 저의 단호한 표현이었지요.
결국, 원불교 출가를 단행하게 되었고 그날 가족들은 “이제 너는 우리 호적에서 제외시킨다.”고 말씀을 하시더군요. 지금 그 때 상황을 돌이켜보면 나에게서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나왔을까 하는 기특한 생각이 들기도 한답니다.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 쓰고 단행한 출가의 길이지만, 그 길에는 저를 시험하는 많은 난관들이 있었습니다. 예비교무시절에는 몇 번 이 길에 대한 의심을 가진 적도 있었고, 친구들의 화려한 생활에 마음이 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고비마다 저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권유에 의한 출가가 아닌 스스로와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출가의 길에 들어선 지 그렇게 30여 년이 지나갑니다.
출가의 길은 고락에서 벗어난 삶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편안하고, 숭고하고, 한가롭고, 여유로운 삶만 있으리라 꿈꾸었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그 길에는 고락도 있고, 시비도 있고, 고락이 함께 하는 일상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도문(道門)에 들어와 느끼게 되는 행복과 불행은 그 근원이 달랐습니다. 지금까지는 원망의 화살이 상대방이나 대상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타인으로 인해 내가 괴로웠고, 대상이 나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내 의식에는 큰 변화가 왔습니다. 문제의 원인이 바깥의 대상이 아니라 바로 자신임을 알게 되었고, 내 눈에 들어간 티끌로 인해 원망과 감사가 나오게 됨도 알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가족들도 따듯한 시선으로 저를 바라봅니다. 저의 작은 깨달음이 가족들의 깨달음이 되고, 그 깨달음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며 살고자 하는 작은 뜻을 키우며 은혜로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꿈꾸는 여행가
글. 유미정

여행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싶을 때가 있었다. 우리나라 국내 곳곳에서부터 내가 상상하지 못한 오지까지 가보는 게 꿈이었다. 이곳저곳 세계 온 곳을 다니며 나만의 책을 집필하고, 또다시 여행을 떠나는 꿈. 지금 사무실에 앉아있는 나를 생각하면 정말 가당치 않은 꿈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꿈꾼다. 내가 사랑하는 여행지에 찾아가 자유롭게 숨 쉬는 나를.
잠시 회사에 다니지 않던 시절, 틈만 나면 몇 푼 안 되는 돈을 들고 여행을 다니던 때가 있었다. 스스로 처음 길을 선택해 찾아간 해외는 나에게 큰 시련과 즐거움, 어른이 되고 난 뒤 처음 가져보는 자유로움을 알려줬다. 고민할 것 없는 여행이었다. 내가 고민해야 할 부분은 오롯이 먹고, 자고, 노는 것뿐이었기에 더 자유롭고 행복했다. 아무도 신경 쓸 필요 없이 마음을 따라가는 여행. 나는 몸과 마음이 힘들 때면, 그날의 하루하루를 되짚으며 간접 힐링을 한다.
영국에서 여권을 잃어버려 주말 내내 우울했던 날, 발급되지 않는 여권 때문에 온종일 숙소에서 눈물을 흘리던 날, 파리에 처음 도착해서 느낀 날씨, 센강을 따라 걸으며 행복했던 나, 피렌체 두오모 성당에 올라서서 시내를 바라보던 황홀함, 프라하의 천연색 날씨 등. 머릿속을 스치는 나라별 각양각색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러한 추억들이 다시금 나를 여행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꿈을 좇던 한 해가 지나고 현재의 나는 다시 회사에 취직했다. 첫해는 너무 정신없게 보내서인지, 여행을 통해 채워온 에너지가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다음 해, 나는 거의 모든 에너지를 고갈하였고, 다시금 여행을 꿈꿨다. ‘한 달에 한 번은 어디든 가자.’고 생각했다. 물론 회사원이기 때문에 그 시간마저 녹록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꿈을 좇아 미미한 발돋움을 하고 있다. 겨울 바다, 여름 바다, 봄 바다로 놀러 가고, 제주도에 가서 제주 바람을 맞으며 돌아다닌다. 단양에서 패러글라이딩도 하고, 일본 오사카에 날아가 거대한 고래상어도 봤다. 앞으로도 나의 여행 서사시는 계속해서 이어질 예정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할 기회가 온다. 나의 행복은 가족의 건강, 나의 꿈에 있다. 가방 하나 메고 여행을 가는 내 모습은 상상만 해도 멋지고 행복한 나의 꿈이다. 또한 언젠가는 이루어질 꿈이다. 그동안 많이 손닿아서 해진 낡은 지도를 들고 돌아다니며 길을 찾는 것도, 혹은 지도 없이 돌아다니는 나도 좋다. 언젠가 좋은 길이 나오겠지 하며 떠도는 여행도 행복하다. 그저 돈만 벌고 살아 숨쉬기만 한다면 인생이 무슨 재미일까. 내 행복을 찾아 떠나는 의미라도 있어야겠다. 모두 그 기회를 잡았으면 좋겠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나를 위해서.


스페인 할아버지의 친절
글. 지준혁

2016년 1월의 겨울날 열정의 나라 스페인으로 떠났을 때의 이야기이다. 동네에서 친하게 지내던 채현이와 채현이 엄마, 그리고 나와 우리 엄마가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세비야에서 만났던 한 할아버지와의 인연을 이야기해볼까 한다.
세비야에 도착한 우리는 고즈넉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골목길을 지나 이국적인 분위기가 매력적인 호텔에 도착했다. 상기되고 들뜬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던 나와 채현이는 방에 가방을 던져두고 바로 호텔을 나섰다. 호텔을 나서며 나는 채현이에게 “형이 여행도 많이 하고, 프랑스도 가봐서 유럽은 잘 알지. 너도 곧 익숙해질 거야. 유럽도 별거 없어. 다 사람 사는 곳인데.”라며 호기를 부렸다.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골목골목을 쏘다니며 이곳저곳을 구경했고, 가끔씩은 영화에서나 나올 듯한 장면을 연출하며 경쟁하듯 페달을 밟았다. 그러나 너무 정신없이 달린 탓일까. 잘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호텔로 가는 길을 완전히 잃었다. 호텔 이름은 첫 글자도 기억이 나지 않았고, 데이터나 와이파이가 안 먹혀 조마조마했다. 나는 평정심을 잃은 채 더 강하고 빠르게 페달을 밟았다. 그러다 결국 오래되고 굴곡진 벽돌 도로 위를 달리던 페달 체인이 자전거에서 빠지는 불상사가 생기고야 말았다.
형으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눈치를 보며 자전거를 길모퉁이로 끌고 가서 자전거 페달과 씨름하고 있던 그 때, 한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what happened here?(무슨 일이에요?)” 알아듣지 못했음에도 우리를 도와주시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는 내 손에 묻은 기름때를 보더니 다정하게 물티슈를 건넸고, 무릎을 굽혀 손에 기름때가 묻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자전거를 손보기 시작했다.
20분의 사투 끝에 체인이 제 자리를 찾았지만 기쁜 마음도 잠시, 여전히 호텔의 이름도 위치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우리의 얼굴에서 걱정이 가시지 않자 할아버지가 “what’s wrong?(뭐가 문제야?)”라고 물었고, 우리는 되지도 않는 영어로 “Hotel, don’t remember.(호텔, 기억나지 않아요.)”이라고 대답했다.
할아버지는 기름 때 묻은 손을 흔들어 대며 이렇게 저렇게 설명을 시도했지만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자, 결국 그는 우리를 호텔로 데려다 주었다. 많은 한국인들이 이곳으로 오는 걸 봤다고 했다. 사례를 하고자 저녁 식사에 초대했지만 그는 도울 수 있어서 자신이 더 기뻤다며 영어로 말했다. “언젠가 스페인 사람을 만날 기회가 생긴다면 오늘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서로 즐거운 시간을 함께해 주시오.”
2년이 거의 지난 오늘에도 기름이 묻은 검은 손을 흔들며 뒤돌아서는 할아버지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한 사람의 자비와 너그러움이 그렇게 네 사람의 여행을 도왔다. 언젠가, 나도 그에게 받았던 도움을 줄 수 있는 날을 꿈꿔본다.
“Se lo agradezco, abuelo.(할아버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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