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꼬가 논에만 있나?
글. 박성철

‘물꼬’는 논에 물이 넘어 들어오게 하거나 나가게 하기 위해서 논두렁에 만든 좁은 통로를 말한다. 평창 동계올림픽 특사단이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것에 대하여도 비유적 대화로 “물꼬를 텄다.”고 한다. 이렇듯 물꼬는 농사를 짓는 데나 막혔던 소통을 트는데도 긴요한 역할을 한다.
지금이야 경지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짓고 있지만, 예전엔 기름지고 물 걱정 없는 문전옥답을 제외하곤 하늘에 의존하는 천수답이 많았다. 그래서 날이 가물어 물이 귀하면 물꼬를 막기 마련이었다. 아래 논은 위 논에서 물꼬를 터주어야 물이 고여 모내기를 할 수 있는데도 터주지 않는다. 그러면 아랫논 사람은 밤에 몰래 위 논의 물꼬를 터서 물을 채워 모내기를 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형제같이 지내던 이웃도 물꼬 때문에 싸우는 경우가 종종 있어 물꼬 싸움이란 말도 생겨났다.

어른들은 비가 많이 오는 날엔 볏짚으로 엮은 도롱이라는 비옷에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삽 하나 들고 물꼬를 보러 들로 나갔다. 미리 물길을 돌리거나 물꼬를 트지 않으면 논둑이 무너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내 논은 말할 것도 없고 아래 논에 큰 피해를 주기도 한다. 장마 뒤엔 어떤 논은 물꼬 아래에 작은 웅덩이가 생기기도 했다. 그런 웅덩이엔 미꾸라지나 우렁이가 많았다. 농사를 마무리할 때쯤이면 어른들은 그런 웅덩이를 찾아다니며 미꾸라지나 우렁이를 잡는 동네 천렵을 했다.

아버지도 비가 많이 오거나 장마가 지면 마을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삽 하나를 들고 들녘으로 나갔다. 그런 날이면 어머니와 다툼이 있기도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해 항시 깨끗하게 손질한 옷을 준비해서 드렸다. 지금으로 말하면 소위 외출복이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일복으로 갈아입지도 않은 채 그대로 비를 맞으며 논밭으로 나갔다.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 아버지의 외출복은 흙탕물에 후줄근하게 젖어 있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옷을 갈아입으면 될 텐데 왜 저렇게 어머니를 힘들게 할까?’ 하는 생각이 항상 머릿속에 맴돌았다.

물꼬는 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 마음속에도 마음을 다스리는 물꼬가 있다. 내 물꼬는 어떨까? 논의 물꼬는 그 주인이 알아서 적당하게 막거나 터서 가을이면 황금 들녘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내 마음의 물꼬는 내가 조절을 해야 한다. 내 마음의 주인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가뭄에 논물 가두듯 나 혼자만의 욕심을 챙기며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장마에 물이 넘치면 이웃 논으로 돌려버리듯 사회와 이웃에게 해독(害毒)을 입히며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또는 아버지가 외출복을 입은 채 물꼬를 보러 갔듯 시비이해를 잘 따져 보며 살아왔는지 한번쯤 뒤돌아보고 싶다.

원불교에서는 자리이타(自利利他)를 가르친다. 자신만 위할 것이 아니라 남도 위하라는 말이다. 그러면 반드시 ‘해에서도 은혜가 나온다.(은생어해, 恩生於害)’고 했다. 옛말에 남의 떡이 더 크게 보인다고 했다. 그래서 살짝 바꾸어 놓고 보니 역시 또 바꾼 그 떡이 크게 보이더란다. 생각의 차이라고 하겠지만 어쩌면 남의 떡이 더 크게 보이는 것이 현실이며 사람의 욕심일지 모른다.

얼마 후면 일 년의 벼농사를 짓기 위한 물꼬 챙기기가 시작된다. 일생을 살아오면서 마음의 물꼬를 잘 트고 막아 내 심전(心田)을 잘 가꾸어 왔는지 내 자신에게 물었다. 그래서 잘못이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물꼬를 잘 조절해야 할 것이 아닌가?
만물이 생동한다는 이 봄에 한번쯤 뒤돌아보며 챙기고 싶은 것은, 성큼 다가 와버린 초여름의 날씨 탓만은 아닐성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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