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청년이 겪은 일①
글. 박주현 경인교대

얼음이 녹는 계절인 5월 압록강의 물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웠습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모질게 다짐한 저의 마음조차 강 중간에서 후회하게 만드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얼마간 수영해 왔을 때 저는 저의 몸이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오직 3년 전 한국행을 하신 어머니의 얼굴만이 이미 멈춘 저의 심장에 전율을 전해주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평소에 저의 이름조차 불러주지 않으셨던 무뚝뚝한 아버지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주현아….” 아들의 생명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사실 앞에 태산 같던 아버지도 모래벽처럼 무너지신 것입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던 탈북 후 저와 아버지에게는 일행이 생겼습니다. 일행 중에는 중국의 시골로 시집을 갔다가 탈출한 동향의 누나가 한분 계셨습니다. 누나는 19세의 어린 나이에 중병을 앓고 계시던 아버지를 살리려고 탈북을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탈북자들이 그렇듯, 누나는 중국인들에게 인간이 아닌 상품이었습니다.

누나는 탈북 직후 브로커들에 의해 연변의 여러 술집들을 전전하다가 장애가 있는 중국인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팔려갔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화가 되지 않는 중국인 남편과 그의 가족은 누나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감금과 폭행을 일삼았습니다. 그 말을 하는 누나의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습니다. 당신은 한국에 가면 아버지를 모셔오고 중국에서 낳은 자식을 데려와 행복하게 사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누나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탈북민들에게 악어강으로 유명한 메콘강은 누나를 살려서 한국으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강의 중간에서 술 취한 현지 브로커의 실수로 배가 뒤집혔고, 어둠 속에서 누나는 사라졌습니다. 강기슭에서야 누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저는 억울함에 숨이 막혀서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누구보다 행복해야 했던 누나가 그 행복을 맛도 보지 못한 채 낯선 타향에서 사고로 생명을 잃은 것입니다.

한국으로 오는 긴 여정 동안 저는 북한에서 태어난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한탄하고 또 한탄했습니다. 이런 생각은 고향누나를 잃고 난 후 더욱 커져갔습니다. 제가 만약 중국에서 태어났더라면 목숨을 건 탈북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고향누나도 마찬가지였겠지요. 대한민국은 그런 저를 다시 태어나게 해 준 고마운 나라였습니다.

대한민국이 없었다면 저는 아직도 사람 이하의 삶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한국에 와서 가장 신기했던 것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을 때였습니다. 세상에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할 수 있는 나라는 많지 않다고 합니다. 불과 30년 전의 한국도 대부분의 국민들은 찬물로 씻어야 했었지요. 하지만 대한민국은 짧은 기간 동안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발전과정을 볼 때마다 저는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한국에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은 채 국민들의 세금으로 여러 가지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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