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 일화 ‘처사시험하기’와
소태산과 옥추경
글. 이정재

여러 번에 걸쳐 살펴본바, 구인기도는 옥추경 독경으로 이루어졌음을 알아보았다. 이공주, 김대거, 김영신, 이경순 등의 자료를 살펴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옥추경 기도를 구인기도문으로 단정하기까지는 풀어야 할 난제가 한 둘이 아니었다. 옥추경의 쓰임새는 한민족에게 장시간에 걸쳐 광범위하고도 복잡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였지만 그에 대한 기록이나 연구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불법연구회 소장 옥추경 이본을 살펴보면 이를 더 보강할 수 있는 많은 단서들이 나올 것이나, 이에 대해서는 추후 논하기로 하고, 먼저 살펴야 할 사안은 옥추경과 소태산의 인연에 대한 것이다. <원불교교사>에는 옥추경을 대각 후 참고한 경으로 되어있으나 그렇지 않았음이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로를 거쳐 소태산은 옥추경을 알게 되었고, 원불교사에 큰 의미를 가지는 구인 단기도에 이 경을 활용하게 되었는지 살펴야 한다. 이 점은 특히 구도과정과 연결이 된다.

‘노루목 대각’이 이루어지기 전 구도과정은 관천기의상, 삼령기원상, 구사고행상, 강변입정상 등 네 단계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전체 십상 중 절반이 구도과정에 해당하지만 정작 관련 자료는 너무도 미흡하다. ‘강변입정상’의 단계는 이전까지 일체의 사상적 지식을 섭렵하며 행했던 수행을 마무리하고 맞이했던 마지막 선정의 단계다. 옥추경과의 관계는 그 직전의 단계와 관련이 있어야 하는데 그때까지에 해당되는 자료는 초기교단사에 나오는 네 종류의 일화에서 찾아져야 한다. 걸인도사시험, 하나님시험, 부처시험하기, 처사시험하기가 그것이다.

앞의 셋은 이미 살펴봤다. ‘하나님시험하기’는 기독교의 유일신 우상숭배에 대한 폐단을 비판한 것이고, ‘부처시험하기’는 불갑사에서(필자는 이 시기 소태산이 백학명과 인연을 가졌던 것으로 보았고, 당처는 불갑사와 그 암자인 용문암으로 추정한바 있었다) 모셔진 부처상을 구박하며 역시 그 우상숭배를 비판한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길룡리에 있던 주막 앞에서 제갈량의 시를 유창하게 읊어대는 걸인을 도사로 오인하여 도를 구하고자 하였으나 좌초된 사례였다.
이 셋은 각각 기독교, 불교 및 도교를 대표하는 것으로 당대의 기성종교에 대한 폐단을 지적하였던 상징적인 의미를 더 가진다. 그렇다면 ‘처사시험하기’는 앞엣 것 이외의 종교를 비판한 것이어야 할 텐데, 유교 이외에는 특별한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또 처사시험의 내용을 보면 유교와는 큰 거리가 있다. 그래서 넷 중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것이 처사시험하기 일화다. 먼저 일화를 옮겨본다.

처사(處士)를 시험(試驗)하신 일1)
또 어느 때에는 어떠한 처사 하나가 산중에 잇다는 말삼을 들으시고 곳 사람을 보내 초빙하엿더니 처사가 먼저 대종사의 부친을 뵈옵고 말하기를 ‘나는 산중에서 공부하야 신통을 얻은 지가 이? 오래이라. 귀하의 아드님이 만일 나를 좇아 공부를 배운다면 반다시 불가사의의 능력을 얻게 될지니, 그 공부에 착수하기로 하면 먼저 귀가에 사육하는 농우(農牛) 1두를 폐백으로 주겠느냐?’고 하엿다. … (중략) …
대종사 말삼하사대 ‘그러면 내가 보는 앞에서 그 신장(神將)을 실지 구경케 하소서’

처사는 즉시 응낙하고 그날 밤부터 정한 방을 치우시고 자기가 평소에 일으는 주문을 고성(高聲)독창(讀唱)하야 종야(終夜)를 지냇으되 신장이 보이지 않는지라 그 처사 초조한 생각으로 다시 말하기를 ‘이것이 아마 근동에 초상이 난 집이 있거나 혹은 해산한 집이 있거나 만일 그러치 아니하면 이 방에서 전자에 혹 초상 해산 등을 지낸 듯하니 오늘 저녁에는 다른 새 방을 하나 정하여 달나’고 간청하였다.

대종사 생각하시되 ‘이것이 반다시 사술이며 허무맹랑한 말이로다. 무슨 공부가 사람의 생사있는 곳을 다 피한다면 그 어느 곳에 쓰게 되리요’하시고 내념(內念)에 가위(可謂) 작파(作破)하셧으나 외면(外面)으로 그 처사의 청한 바를 용인(容認)하야 다시 다른 새 방 하나를 정하여 주엇더니 그 처사 또한 종야(終夜) 송주(誦呪)하되 신장이 종시 보이지 않는지라 그 처사 대단 황공(惶恐)참괴(慙愧)하야 그날 새벽에 소태산 외출하신 틈을 타서 가만이 월장(越牆) 도주하엿다 한다.

일화의 내용은 한 처사를 초청하여 신통력을 보이도록 하였으나, 성공치 못하자 그를 내쫓았다는 내용이다. 일화가 전하는 내용은 얼핏 보기에 특별할 것이 없는 처사의 술수 혹은 사술을 비판한 내용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내용 중 등장하는 몇몇 용어와 언사는 내용의 특별함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즉 신장부르기, 육정육갑 통령하기, 종야의 송주(誦呪)하기 등은 신통을 얻었다고 하는 내용 외에도 일상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들이 아니다. 특히 신통을 하여 어떤 초능력을 보여줄 수 있다고 했던 ‘처사’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관련된 민속 전승을 파악하는 것이 주요 과제로 남게 된다.

이외에도 처사를 초빙하게 된 경로나 의례의 절차와 방법 및 그 댓가로 농우 한 두의 사례 등에 대한 것은 별도로 살펴야 하는 중요 사안들이다. 뜯어볼수록 이 일화는 다른 일화들과 비교되는 특별한 점이 많다. 그 중 가장 먼저 알아볼 것은 ‘처사’에 대한 용어 사용이다. 이것이 밝혀져야 이 일화의 사상적 배경이 어디에 연결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소태산 자신을 ‘처사’라 지칭하기도 하였다는 점이다. 두 처사의 상관성 여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처사에 대한 <원불교 사전>의 정의는 이렇다. ‘처사; 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초
야에 묻혀 살던 선비. 불가에서는 남자신도를 처사, 거사, 우바새(청신사(淸信士))라
고 부른다. 소태산 대종사 대각전에 시봉하던 이원화가 소태산을 처사님으로 존대하
여 불렀다.’
불가와 유가에서 두루 사용하였다는 설명이다. 박용덕의 글에는 이 부분을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쓰고 있다.

“소태산은 대각 전후에 처화씨, 장촌 양반(부인 양하운의 고향 장지리, 장지촌에서 연유)으로 불려졌다. 또 처사라 부르기도 했다. 그를 시봉하던 이원화가 존칭해서 ‘처사님’이라 부른 이름이다.”(박용덕, <원불교 초기교단사 4>-금강산의 주인이 되라-, 517~518쪽)

대각 전후라 하면 대각 후에도 잠시 그렇게 불리었다고 이해된다. 박중빈이 대각자로 인정받아 대종사란 칭호를 얻기까지는 2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전까지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먼저 길룡리에서는 ‘당신님’, ‘성사님’으로, 변산 봉래정사에서는 ‘사부님’, ‘천지선생’, ‘석두거사’, ‘처사’(이 당시 소태산은 자신을 스스로 처사라 칭하였다고 한다.(위의 책, 522쪽)), 또 익산에서는 ‘총재님’, ‘선생님’ 등 다양한 호칭을 가졌다. ‘종사주’, ‘종사’ 혹은 ‘종법사’, ‘대종사’로 불리게 된 것은 훨씬 뒤인 1930년 경에 이르러서다. 처화에게 맨 처음 처사라 불러줬던 이원화는 어떤 인물일까. <원불교 사전>의 설명은 이렇다.

“李願華(1884~1964); 여자 전무출신 제1호. 소태산 대종사가 대각하기 전 구도의 뒷바라지에 힘썼다. … 천성이 어질고 활발하여 사람들과 잘 화(和)했다. 어려운 전반생을 살다가 소태산을 곁에서 시봉하는 인연이 되었다. 소태산의 대각 후에는 제자로서 방언공사와 구간도실 건축에 조력했으며, 영산원 안살림의 주인이 되어 모든 노고를 다했다. 이후 영산교당에서 감원·순교의 직으로 40여 년간 봉직했다. (하략)….”

대각을 전후하여 가장 가까이서 시중을 들었던 이원화가 소태산을 ‘처사’라고 불렀다 했는데, 이건 이 당시까지의 최고 존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용어는 구도의 과정에서 얻은 것이며, 앞서 소개한 신통력을 보이고자 하였던 그 처사와 동일한 시기에 주어진 호칭이다. 일화는 ‘처사’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럼에도 같은 ‘처사’ 호칭을 사용한 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존칭과 내침의 용어 ‘처사’는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Ι교수·경희대학교 민속학연구소장. hogo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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