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명희 수녀
하느님의 이름으로 베풀어라
취재. 장지해 편집장

아버지는 도(道)를 닦기 위해 자주 절에 들어가셨다. 가정을 돌보는 일은 뒷전이었던 아버지와 담판을 짓던 날, 딸은 매서운 한 마디를 남겼다. “아버지 대신 제가 도를 닦을 테니, 아버지가 가정을 책임지세요.”
그때부터 시작된 수녀의 길. 어느덧 4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노년기에 접어들고 보니 ‘아버지 대신 도 닦겠다고 해놓고, 과연 도를 닦고 있나?’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고 말하는 장명희(콘솔시아) 수녀다. “스스로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동안 인간적으로는 잘 살아왔지만, 도는 안 닦은 것 같아요. 수녀가 도를 이야기 하다니, 참 별나죠? 하하.”
불교 성향이 짙은 집안에서 자랐지만 정작 가톨릭으로 출가(?) 한 그. 한때는 갈등의 요소였던 삶의 스토리 일부는, 이젠 오히려 종교인으로 살아가는 그에게 수도생활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어주고 있다.
알고 보면 2008년부터 5년 동안 충주성심학교(청각장애 가톨릭 특수학교) 야구부원들과의 이야기로 유명한 장 수녀. 교장수녀로 발령받을 당시만 해도 야구부를 없애겠다던 그의 각오가 변한 건, 인생에서 처음으로 관전한 야구 경기에서 대패하고도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아이들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기꺼이 아이들의 엄마를 자청하며 앞치마를 둘러맸던 그. 거기에는 야구를 통해 ‘장애’라는 담장을 넘어서게 하고픈 절절한 마음이 있었다.

● 퇴직하시고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충주성심학교는 특수학교라 어려움이 늘 상주하기에 부담감이 있었는데, 그게 좀 덜어졌죠. 위험요소가 여러 가지 있었는데도 무난히 5년을 보낼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했던지요. 퇴직 후 6년 사이에 본당근무도 하고, 노년기를 준비하며 노년기 공동체에도 있다가 올해 2월에 이곳(인천 가정동 기도의 집)으로 왔어요.”

● 충주성심학교 야구부에 정신적·물질적 힘을 주셨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회자가 되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발령받아 갈 때까지 야구의 이응(ㅇ)자도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아이들이 새 학기를 시작하며 치르는 오픈 경기를 본 게 제 인생 첫 야구 관전이었죠. 그런데 21대 1로 대패한 그 경기 결과를  ‘원래 그렇지 뭐.’ 하면서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아이들과 선생님을 보면서 어찌나 화가 나던지…. 그 첫 경험에서 새로운 눈이 뜨였죠.”

부모님들 인솔 하에 든든한 식사를 하러 가던 상대편 모습에 교장이던 자신의 기가 죽던 기억은 너무나도 생생하다. 그때부터 한 달에 한 번 직접 아이들의 특식을 담당한 장 수녀. 더 나은 야구부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겪은 고군분투야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고되게 여기지 않았던 건, ‘내가 교장이니, 내가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주면 되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 그 정성이 아이들에게 오롯이 전해졌을 텐데요. “2년 정도 지나니까 아이들이 정말 어딜 가도 기죽지 않더라고요. 처음에는 ‘장애를 가졌으니 지는 게 익숙하다.’고 여겨서 삼진을 먹어도 창피해하거나 화낼 줄 모르더니, 못한 것에 대해 화도 내고 방망이를 바닥에 던지기도 하면서 표현을 하는 거죠. 누군가 자신들을 위해 정성을 쏟아주고 있다는 게 아이들에게는 큰 자신감이 되는 것 같았어요.”

삶의 목표가 불분명하던 아이들은 야구를 통해 진취적이게 되었다. 비록 1승은 못 이뤘어도, 단 1루도 진출하지 못하던 아이들은 12점이라는 점수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점수보다 더 큰 소득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이었다. 땀 흘려 노력한 대가를 직접 경험한 아이들은 어떤 일이든 쉽게 포기하지 않게 됐고, 이는 야구라는 영역을 넘어 사회로 진출했을 때 진가를 발휘했다.

● 야구를 통해 삶과 인생을 배우는 거네요. “저도 처음엔 이해를 못했어요. 단순히 ‘청각장애 아이들을 데리고 무슨 야구를 하나?’라고만 생각했죠. 그런데 겪어보니, 우리 애들이 야구를 안 하면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좌절한 상태에서 시작해서 좌절한 상태로 끝나요. 희망이 없죠. 그런데 야구라도 하니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잖아요. 야구가 아니라면 장애를 가진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비장애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경기를 할 수 있을까요? 아마 비장애인들의 세계에 절대 들어갈 수가 없었을 거예요.”

성심학교 아이들에게 야구란, 비록 귀만 안 들릴 뿐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다. 팀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과감히 나를 희생하기도 하고, 경기를 잘 진행하기 위해 규칙도 잘 지키게 되는 것. 실제로 농아인만 50여 명 가량 근무하는 어떤 회사에서는 “충주성심학교 아구부 출신 아이들이 가장 성실하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단다.

● 아이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비결이 있나요? “저 역시 좀 특이한 환경에서 공부를 해서 그런 것 같아요. 방학 때마다 고향에 내려와서 ‘너는 꼭 대학을 가야 한다.’고 말한 선배언니가 있었는데, 그 언니가 제 대학 시절 내내 한 달에 이천 원씩을 줬어요.(70년대 초, 2천 원이면 쌀이 두 말이던 시절) 하도 염치가 없어서 ‘이 은혜를 어떻게 갚지요?’ 했더니 언니가 ‘나도 누군가에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받은 도움을 나누는 것’이라며 ‘하느님의 이름으로 도움 받았으니, 네가 선생님이 되면 하느님의 이름으로 베풀어.’라고 하더라고요.”

목사님과 상의해서 월급의 십일조에 해당하는 금액(4천 원)을 두 명의 학생을 지원하는 데 썼던 선배언니. ‘하느님의 이름으로 받은 도움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다시 베풀어야 한다.’는 메시지는 그렇게 장 수녀의 뼈에 사무쳤다. 그러니 그 마음이 사범대를 졸업하고 교사가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어찌 제자들에게 오롯이 전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 교육에 대한 남다른 철학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교육자라면, 어떤 상황에서라도 교육을 받는 이가 교육을 통해 더 나은 세계로 끌어 올라오게 해야 해요. 그게 사명이 되어야 하죠. 옛말에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이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자에게 개천에서 용을 볼 줄 아는 눈이 필요해요. 물론 이미 좌절해 있는 대상을 끌어올리려면 굉장한 인내와 끈기가 필요하고, 그래서 너무너무 어렵죠. 하지만 자질을 가진 친구들은 분명 뭔가가 달라요. 하느님께서 12사도를 뽑았고, 그 사람들이 전 세계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역할을 해냈잖아요. 그 사람이 가진 역량을 잘 뽑아내 줌으로써 그에 맞는 역할을 하게 하는 것, 그게 교육의 참 의미라고 생각해요.”

● 수녀님 삶에서 불교와의 각별한 인연을 빠뜨릴 수 없을 것 같은데요. “가끔 수녀가 아니라 스님이 되었다면 신세가 더 편했을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이 흘러가는 대로 살지 않고 거슬러 오르며 살아온 느낌이랄까요? 하하. 그래서 더 힘들기도 했겠지만, 그때마다 하느님이 현존하신다는 체험을 했어요. 이제는 두 종교를 비교도 하고 공통점도 찾아가면서 내가 선택한 이 길을 끝까지 갈만한 내공이 생긴 것 같아요.”

그럼에도 살고 싶은 인생의 마지막 풍경을 그려가다 보면 꼭 스님 삶에 가까워지더라고 말하며 웃는 그. 먹거리가 무너져가는 세상에서, 꽃차와 효소, 발효음식 등을 만들어 <봐라! 피었다 산야초 효소> 저자 여여스님처럼 생명을 잘 전달하는 일을 하고 싶은 것이다. 속리산자락 천주교 성지에서 세상살이 목마름으로 성지를 찾아오는 순례객들에게 영혼의 갈증을 풀어주는 옹달샘같은 삶을 살고 싶었던 그는, 그 환상의 꿈을 접고 이곳 가정동 기도의 집에서 하고 싶었던 옹달샘 일들을 조금씩 시작한 참이다.

● 종교가 세상을 위해 해야 할 역할에 대한 고민이 많습니다. “종교 생활이나 종교 신앙이 계속 똑같은 모습으로 갈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각 종교의 신앙인들은 ‘같은 신앙인들끼리만’을 고수하며 기복신앙에 초점을 두었다면, 현 세상에서는 나도 구원받고 세상도 같이 구원하는 길을 가는 종교라야 잘 될 거라고 생각해요. 세상과 함께 살아가면서 너나할 것 없이 공동선(善)으로 함께 이끄는 일, 그게 종교의 가장 큰 역할 아닐까요?”

종교 무용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질문에, 그는 “몰라서 그렇다.”고 했다. 정말로 하느님을 체험하고, 정말로 득도를 하면 종교 무용론을 이야기 할 수 없다는 것. 물질이 아무리 발달해도 종교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평온한 얼굴로 그 길을 묵묵하게 걸어갈 수 있는 이유는, 종교적 삶은 돈이나 물질에 좌지우지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길을 가는 것 자체로 생명, 구원, 행복을 얻는 것이니 말이다.

● 평소 표준 삼는 말씀이 있다면요? “하느님과의 만남이 저를 지탱해가고 있고, 그것 때문에 살아가요. 최근에 <마르꼬복음> 8장 28절에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말씀이 많이 와 닿는데, 아마 죽을 때까지도 이 성경 구절을 가장 깊이 새기며 살아갈 것 같아요. ‘지금 여기에 살아계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 행복하고 은혜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전해주세요. “각자 자신이 믿는 종교가 있을 텐데, 그걸 진실히 믿으면서 날마다 감사하며 살면 좋겠어요. 서울대 교사행복대학의 교육내용 가운데 가장 기본이 감사하기예요. 저는 그 교육을 받기 이전의 감사와 교육을 받은 이후의 감사 개념이 달라졌어요. 교육받기 이전에는 내가 원하는 것을 받으면 감사했는데, 교육 이후에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것이 행복의 기본이라는 걸 알게 된 거죠. 그렇게 살면 모두가 행복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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